돈이 돌지 않는다.

금융권에서 기업으로 흘러가는 돈줄이 메말라가고 금융권내에서도 부실
은행과 종금사로 나가는 돈줄은 사실상 끊긴 상태다.

금융시스템을 인체로 얘기하면 돈은 혈액이다.

혈액이 엉뚱한 곳에 고이고 제대로 돌지 않으면 몸에 마비현상이 나타난다.

한국 금융시스템이 총체적인 마비상태에 빠져 들고 있는 것도 바로 돈의
흐름이 꼬이고 있어서다.

시중자금은 은행대출로 기업에 나가거나 은행과 투신사의 회사채및
기업어음(CP)매입과정을 통해 제2금융권을 거쳐 기업으로 흘러가는게
통상적이다.

기업은 이렇게 대출된 돈을 운용하다가 일시 여유가 생기면 남는 돈을
제2금융권에 예금한다.

한국은행에서 제조된 돈이 금융권을 거쳐 기업으로 갔다가 다시 금융권으로
순환되는 것이다.

이같은 자금흐름이 깨지고 있다.

<> 금융권과 기업간 흐름 =금융시스템의 마비현상은 금융권과 기업간 자금
흐름에서 우선 나타나고 있다.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등 올들어 한달에 한번꼴로 대기업이
쓰러지면서 은행권의 기업대출 창구가 꽁꽁 얼어붙었다.

우량 대기업을제외하곤 신용대출은 꿈도 못꾸는 상황이다.

정부가 기아협력업체를 살리기 위해 은행에 기아 발행어음 할인을 독려해도
일선지점에서는 꿈쩍도 않는다.

최근 한달새 당좌대출 금리가 1.5%포인트 올라 연 14%대에 육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은행신탁과 투신사등의 CP매입을 통해 기업으로 흘러가는 자금줄도 바닥이
보일 정도다.

실제 종금사의 CP매출규모는 이달 들어 보름동안에 5천8백38억원이 줄었다.

이에따라 종금사도 현대 삼성 LG 등 초우량 기업이 아니면 CP할인을
꺼리고 있다.

특히 추석자금 성수기를 앞두고 금리상승을 우려한 대기업의 가수요로
중소기업으로 흘러가는 돈줄이 더욱 마르고 있다.

"10대 그룹내에서도 CP할인율이 2%포인트까지 벌어지고 있다"(중앙종금
김광호부장).

기업으로 흘러 나간 돈도 제2금융권으로 제대로 환류되지 않고 있다.

종금사에 돈을 맡기길 꺼리는 기업이 늘고 있다.

종금사 수신이 이달 들어서만 1조7백15억원 감소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따라 일부 종금사는 부족자금을 마련키 위해 자금회수에 나섰다.

기업의 여유돈이 자발적으로 금융권으로 환류되는게 아니라 기업의 운영
자금이 강제적으로 금융권에 회수되는 것이다.

서울소재 한 종금사의 여신담당임원은 "이달중 도래하는 어음만 1조원
어치이다.

교환에 돌리면 부족자금을 메우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 금융기관간 흐름 =금융권내 돈 흐름도 엉망이다.

은행권에서 종금사로 흘러가는 자금흐름이 꼬이고 있다.

통상 은행권의 여유돈은 콜시장을 통해 종금사로 흘러가지만 최근들어
절대량이 줄고 있다.

은행신탁은 기아사태이후 종금사에 대한 콜공급을 절반 이하인 3천억원대로
줄였다.

농협은 종금사에 대한 콜공급을 중단했다.

한국은행이 환매채(RP) 지원으로 시중에 돈을 아무리 풀어도 은행권에서만
맴돌뿐 종금사로 가지 않는다.

은행신탁과 고유계정이 돈을 주고 받는 브리지론이 성행하고 있다.

콜차입이 힘들어진 일부 종금사는 거래기업의 당좌대월까지 끌어쓰고 있다.

은행권의 돈이 종금사로 직접 가지 못하고 기업을 거쳐 우회해 들어가는
다단계 자금흐름이 생겨나고 있다.

이는 자금회전 속도를 떨어뜨릴 뿐아니라 단계를 거칠때마다 돈에 추가
금리가 붙어 최종 자금수요자인 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킨다.

종금사로 돈이 제때 흘러가지 않는 것은 올들어서만 8조5천억원에 달하는
부실채권을 떠안게 된 종금사에 대한 은행권의 불신에서 연유한다.

은행권의 한국은행에 대한 불신도 금융권내 돈 흐름을 꼬이게 하고 있다.

은행권은 MMDA(시장금리부수시입출금식예금) 등장으로 M2(현금통화+예금
통화) 증가율 상승을 우려한 한은이 통화고삐를 조이고 있다고 믿고 돈을
보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기아사태 장기화로 인한 심리적인 불안감이 신용과 금리에 앞서 돈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다.

돈의 흐름이 경제원리를 벗어나면서 한국금융시스템이 총체적인 마비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 오광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