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요즘 뒤숭숭하다.

잇단 부도와 그에 따른 금융긴축으로 자금사정이 어려운 기업일수록
특히 그렇다.

정부가 최근들어 "초강경" 내용을 담은 새로운 대기업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어서다.

안그래도 경기 하강국면을 뚫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판에 "앞으로
부채가 많은 기업들은 절대로 안봐준다"식의 정책들이 쏟아지니 경영은 더욱
불안해지기만 한다.

사정이 좀 나은 기업들이라고 해서 다른 것은 별로 없다.

현실경기를 보는 인식이 재계와는 너무 다른 정부에 놀랄뿐이다.

그래서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정부가 이렇게 세게 나오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만 늘어가고 있다.

상법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룹기획실과 비서실을 폐지하겠다는 안을
넣어 "21세기 국가과제"를 내놓는등 2000년에나 가야 시행할 정책을
덜컥덜컥 발표하는 정부의 "진의"를 의심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S그룹 관계자는 "문민정부 초기에 실시해도 될까 말까한 정책을 집권말기에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눈총을 피할 수 없게 돼있다"는 말로 정부의 잇단
대기업정책발표가 선거를 의식한 것이란 설명을 대신했다.

균형의식과 평등의식이 유난히 강한 우리 유권자에게 "재벌을 혼내주는"
정의로운 정부의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다름아니라는
얘기다.

H그룹 관계자도 "우리는 이 정책들이 실현될 가능성을 절대로 높게
보고 있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정책 자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특히 기업재무구조 개선에 정부가 개입하겠다는데 대한 반발이 거세다.

"기업경영 방식이든 재무구조는 앞으로는 정부가 개입하면 개입할수록
더 악화될 것"이라는 게 전경련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 관계자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들에서도 이미 정부가 산업정책에
개입하는 방식은 종언을 고했다"며 경제위기 해결에 대한 정부의 접근 방법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원인의 해결은 뒤로 미룬채 부작용에 대한 대증요법으로만 나서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보그룹의 부도의 경우 그 직접적인 원인은 무리한 대출을 해준 은행이고
은행에 과다하게 개입한 것이 바로 정부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은행을 붙잡고 앉아 금융의 후진화를 가속화한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은채
그 부작용으로 나타난 차입경영만을 근절시키겠다고 나서봐야 그것은 규제만
양산하는 결과를 나을 것이란 지적이다.

비서실 기획실 폐지나 계열기업 경영의 책임을 오너회장에게 묻겠다는
정부의 방침도 재걔로선 현실 관행과는 거리가 먼 "한심한 발상"일 뿐이다.

D그룹 관계자는 각 부처에서 "청와대 비서실로 파견되는 공무원의 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고 볼멘 소리를 냈다.

그러나 이렇게 상황분석을 끝낸 재걔로서도 뾰족한 대응책이 없어
속을 태우고 있다.

맞서 싸우자니 칼자루는 정부가 쥐고 있고 그냥 있자니 경제는 수렁으로
빠져갈 뿐이다.

더구나 이런 대기업정책이 선거유세 과정에서 경쟁적으로 쏟아져 나올
것을 생각하니 아찔하다는게 기업관계자들의 한숨이다.

< 권영설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