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15개국 재무장관들은 걸핏하면 회동한다.

유럽인들이 "유러"라는 한가지 통화만 사용토록 하자는 이른바 유럽통화통합
(EMU) 계획 때문에 자주 만나야 했다.

이처럼 EU 재무장관 회담은 회동이 잦은데다 내용도 기술적인 얘기가 많아
국제적으로 관심을 끈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지난8.9일 양일간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15개국 재무장관 회담
에서는 통화통합의 성공 여부를 의심하게 만드는 회원국간의 "다툼"이
벌어졌다.

즉각 뉴욕 런던등 국제금융가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외환시장에서 딜러들이 독일 마르크화를 매집하려고 달려들었으며
파리증권거래소의 주가지수는 하루만에 1.2%정도 급락했다.

유럽단일통화가 사용될 것을 가정해 경영정책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인들도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이번 룩셈부르크회담에서 문제를 제기한 쪽은 프랑스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재무장관.

스트로스-칸장관이 한 말은 "프랑스가 안정화 협약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선 조금 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

그동안의 유럽통화통합 추진일정과 각국이 입을 맞춘 조약등을 감안하면
프랑스 재무장관의 9일 발언은 자칫 EU의 통화통합계획 자체를 뒤흔드는
"폭탄 선언"으로 풀이될 수도 있다.

프랑스를 포함한 EU국은 작년 12월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가진 정상회담을
통해 통화통합을 강력하게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안정화 협약"에 합의
했었다.

오는 99년1월로 예정된 유럽통화통합 발족이후에 가입조건인 재정적자 GDP
(국내총생산)대비 3%이내를 못지키는 나라에 대해선 예산의 최고 0.5%에
달하는 무거운 벌금을 매기자는 협약이다.

이런 통제장치가 없으면 가입조건인 "재정적자 3% 이내"가 유명무실해지고
통합통화인 "유러"는 돈가치 없는 통화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독일측 주장
이 많이 반영된 협약이었다.

통화통합의 성공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이런 중대한 안정화 협약에 대해
프랑스의 재무장관이 "두고 보자"식으로 한 발 물러서버린 것이다.

독일을 비롯한 다른 나라장관들은 아연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바로 다음주초인 16.17일 이틀간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예정인 EU
정상회담에서 이 안정화 협약을 확정키로 기정사실화 해놓은 마당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공개적으로 나와 충격적이었다.

통화통합을 이끌어온 독일측의 테오 바이겔 재무장관은 회담장에서 즉각
"통합조건에 대한 어떠한 수정제의도 거부한다"며 프랑스쪽을 향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유럽의 관측통들은 EU의 두 강국이 원칙적인 합의를 본 상황인 통화통합
조건을 둘러싸고 새삼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통합일정에
먹구름이 낀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프랑스의 사회당 내각이 총선때 내건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 새로운 통합
조건을 내걸 가능성은 큰 것으로 전망돼 왔다.

이런 맥락에서 룩셈부르크회담에서 프랑스 재무장관이 충격발언을 한 것을
독일쪽에 수정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정치적인 제스처로 해석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독일과 프랑스는 오는13일 프랑스 비엔주의 중심도시인 푸아티에에서
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이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와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 대통령, 신임 리오넬
조스팽총리가 만나서 이번 재무장관회담에서 노출된 통합상의 의견충돌을
다룰 것이 분명하다.

푸아티에의 독일.프랑스 정상회담에서 합의가 나오지 않으면 다음주초의
암스테르담 EU 정상회담으로 숙제가 넘어간다.

그렇지만 뉴욕과 런던의 금융가는 유럽의 통화통합작업이 이미 정상궤도를
상당히 벗어난 것으로 감을 잡고 있다.

뉴욕과 런던의 시장에서 독일 마르크화에 사자주문이 몰리고 프랑스 프랑화
등에 팔자가 터져 나온 것은 독일 마르크화를 대신할 것으로 믿어 왔던
"유러"의 출현이 어쩌면 힘들지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양홍모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6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