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도 "소비자 파산시대"에 들어섰다.

소비자 파산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일반화돼 있는 일종의
채무자 구제책이다.

개인이 신용대출이나 빚보증 등으로 과다한 채무를 졌으나 갚을 능력을
상실한 경우 법원에 채무를 면제시켜달라고 신청하는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62년 파산법이 제정된 이후 그간 신청이 없어
사문화된 제도로 인식돼왔다.

그러나 30일 서울지법이 과다한 빚보증을 이기지 못해 파산신청을 한
대학교수 부인에게 파산선고결정을 내림으로써 빛을 보게 됐다.

소비자 파산신청이 접수되면 법원은 채무자의 재산이나 채무상황을 조사한
뒤 현실적으로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 파산을 선고하게 된다.

일단 법원에 의해 "파산자"로 선고받은 사람은 은행 등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물론 본인명의로 계좌를 개설할 수도 없게 된다.

법원의 허가없이 거주지를 옮길 수 없으며 신원증명서에 파산사실이
기재되기 때문에 일반기업체나 관공서 취업도 불가능해진다.

파산자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이 남아있는 경우 법원은 파산선고와 함께
파산관재인을 지정해 남은 재산을 채권자들에게 배당토록 한다.

파산자에게 재산이 거의 없을 경우 법원은 관재인선임, 재산배당 등의
절차를 생략하고 파산선고와 동시에 파산폐지결정을 내린다.

그렇다고 파산자 낙인이 평생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은 파산폐지결정 후 1개월 이내에 면책을 신청할 수
있다.

법원은 파산자를 심문해 사기파산 허위진술 등의 결격사유가 없으면 면책
결정을 내리게 되며 파산자는 면책결정과 함께 파산선고로 잃은 모든 사회적
권리를 회복하게 된다.

빚만 면제받고 파산선고 이전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파산제도는 채무변제능력이 없어 절망에 빠진 소비자가 새로운
각오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예외적 구제수단인 셈이다.

물론 금융기관 등 채권자의 입장에서 소비자파산제도는 빌려준 돈을
합법적으로 떼이는 부당한 제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와 관련 법원관계자는 "아무런 재산이 없는 채무자에게서는 파산선고와
관계없이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라며 "오히려 은행은 소비자
파산시대에 맞게 매출상승만을 위해 신용대출을 남발하는 관행을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파산법은 소비자가 재산을 은닉하고 허위로 파산신청을 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 10년이하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파산제도라는 마지막 보루가 뚜렷한 수입원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리한 소비나 신용거래를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국내에서 신용카드를 이용한 과소비가 사회문제화 되고 있는 형편임을
감안할 때 법원의 이번 결정은 소비자 파산 신청자의 급증을 예고한다고
볼수 있다.

일본의 경우 지난해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접수된 신청건수만 3천2백건,
전국적으로는 6만건에 이른다.

소비자파산은 신용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정착을 위해 우리사회가
헤쳐나가야 할 또 하나의 관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 김인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3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