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그룹의 자금난이 심각한 지경이랍니다. 종금사들은 이미 자금회수에
들어갔대요"

"최근 주가가 급등하고 있는 S실업의 경우 일부 작전세력이 개입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지난 23일 11시께 여의도 증권가 모 단란주점.

30대 초반의 정장차림 젊은이 5-6명이 서로 깨알같은 글씨로 상대방의
말을 노트에 옮겨 적고 있다.

이른바 "정보회의"라 해서 증권사 정보전담직원들이 각자 정보를 가져와
교환하는 모습이다.

적어도 기업과 관련된 루머에 있어선 가장 폭넓게 "생산"되고, "유통"되는
곳이 바로 이같은 증권가 정보시장이다.

루머가 생산되는 곳은 증권시장 뿐만 아니다.

증권사 정보팀들이 꼽는 최대 생산처는 역시 해당 기업.

기업 관계자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눈덩이처럼 불어 그럴듯한 "루머"로
둔갑한다.

예컨대 경리부장이 "이번달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당좌차월을 일으켰다"고
말한 것이 "경영이 어렵다"고 곡해되고 이것이 또 "월급 주기도 힘들다"고
부풀려지는 케이스다.

은행이나 증권사의 여신담당자나 기업분석가들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루머를 만들어낸다.

기업인들과 접촉이 잦고 기업내부사정에 밝기 때문이다.

"재고가 쌓여 라인하나가 가동되지 않는다"는 말이 금새 "C사 가동중단"으로
와전되는 구조다.

그렇다면 루머는 왜 만들어질까.

당연한 얘기이지만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고급정보를 원하는 이들은 많지만, 공급은 그에 턱없이 못미치니까 그
역작용으로 루머가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루머는 그 자체로선 아무런 가치판단이 개입돼 있지 않다.

심각한 것은 루머가 "사회성"이란 날개를 달고 의도적으로 전파될 때다.

따라서 특정세력이 악의로 루머를 퍼뜨릴 경우 그 해악은 심각하다.

루머에 의존해 의사결정을 한 주식투자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사자인
기업은 루머에 따라 존폐 여부가 결정되기도 한다.

"특정기업의 자금악화설" 같은게 대표적이다.

캐시 플로우에 문제가 없던 기업이 어느 순간 자금악화설에 휩싸이는
경우를 가정해 보자.

담보가 없는 2금융권은 1차적으로 채권을 회수하려 한다.

이는 곧 루머가 한층 설득력 있게 퍼지는 계기가 된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도 2금융권 채권이 한꺼번에 돌아오면 막아내기 힘들다.

결과적으로 해당기업은 "진짜로" 자금사정에 곤란을 겪게 되며 최악의
경우 "흑자부도" 상황에까지 이루게 된다.

부인공시를 내거나 적극적인 해명을 한다해도 이미 때는 늦다.

오히려 루머를 부풀리는 역효과를 빚기도 한다.

루머에 있어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예외없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중견의류제조업체인 S사는 지난 21일 자금악화설이 퍼지면서 증시에 상장된
4개 계열사들이 일제히 하한가를 쳤다가 하루만에 강세로 돌아섰다.

이 회사 P회장은 "창업이후 한번도 적자를 낸 일이 없는데 이런 헛소문이
도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분개했다.

최근 구속된 김현철씨 수사과정에서도 이같은 음해성 루머가 난무했다.

D건설의 경우 현철씨에게 수억원의 자금을 줬다거나 자금을 관리했다는
소문이 검찰 관계자의 입을 빌어 나돌자 금융권에서 대출금을 회수하는 등
곤욕을 치렀다.

D사측은 충남지역의 경쟁사인 G건설쪽에서 흘린 것으로 심증을 굳히고
있지만 뾰족한 대응방법이 없어 냉가슴만 앓고 있다.

루머가 좋을 것은 없지만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루머는 또 고급정보와 통하기도 한다.

한보부도사태의 경우에서도 이는 확인된다.

증권가에선 지난해 말부터 한보부도 "설"이 난무했다.

만약 그때 개인투자가가 당시 루머를 믿고 보유주식을 내다 팔았다면 이는
재산을 지켜준 은인이나 다름없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가 개입된 악성루머다.

이는 해당 기업뿐만 아니라 개인투자가, 나아가선 국민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악성루머의 근절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라는 얘기다.

<이의철 기자>

(한국경제신문 1997년 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