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로터스는 최고의 속도를 다투는 "푸율러1"레이스에서 79승의
업적을 이루며 통산성적4위를 지키는 레이싱카 명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화려한 레이싱 전통은 1948년 로터스 제작 초창기부터 시작됐다.

콜린 채프만 이라는 사람은 사업적인 수완이 뛰어난 드라이버이면서
엔지니어 센스가 뛰어난 카 디자이너 였다.

그는 교량등의 토목공사를 맡으면서 견고한 프레임 구조에 정통하게
됐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에는 튼튼하면서 가벼운 프레임 구조에다
다른 자동차회사의 부품을 얻어 경주용 스포츠카를 하나씩 만들게 됐다.

그중에서도 가볍고 튼튼한 바디에 부드러운 서스펜션으로 이름난
"마트6"의 뛰어난 핸들링 성능이 알려지면서 주위로 부터 한 두대씩
제작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시작된 자동차 제작은 1953년부터 2년간 1백여대를 만들어
팔 정도로 성장하게 됐다.

한때는 주문에 밀려 본인이 조립하여 만들 수 있도록 자동차 부품
세트로 팔기까지 했다.

이에 채프만은 대량생산을 위한 정통 스포츠카제작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스타일링은 그의 친구이자 고객인 커반 테일러라는 회계사가 맡았다.

그는 채프만의 마크6를 디자인하고 손수 자동차 바디를 제작한 엔지니어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스케치한 소포츠카를 채프만에게 보여주게 되었고 화려한
장식이 자제되면서 심플하고 아름다운 선과 곡면은 채프만은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기존의 철제 판넬로는 아름다운 차체 곡면을 표현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됐다.

여기서 채프만의 뛰어난 엔지니어 센스가 발동하게 된다.

곡면을 자유자재로 연출할 수 있는 플라스틱 바디를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최초의 플라스틱 바디인 유리섬유로 제작된 차의 탄생을
볼수 있게 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첫 시제품이 1957년 "엘리트"라는 이름으로 런던
모터쇼에 모습을 보였다.

이에 "오토카"잡지는 "우리는 지금 가장 위대한 전시품을 보고 있다"고
극찬했다.

이차는 처음에는 60여개의 차체부품으로 이루어졌었는데 대량생산을
위하여 3개의 부품으로 단순화시켰다.

그래서 도어 윈도는 요즘같이 손잡이를 돌려 위아래로 여닫는 타입이
되지 못하고 유리창을 통째로 떼어내 뒷자석에 부착시키는 방식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리섬유 덕분에 엘리트는 무게가 1천kg정도 되는 ''엑센트''
수준의 차이면서도 불과 6백73kg에 지나지 않는 초경량차가 될수 있었다.

탁월한 성능을 발휘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최고시속 1백85km에 13.4초만에 시속1백km를 돌파함으로써 뛰어난
가속성능을 나타냈다.

그러나 엘리트는 수익성에서는 최악이었다.

최초로 플라스틱 보디를 적용하긴 하였지만 아직 플라스틱 성형기술이
따라오지 못함으로 인해 품질이 수준 이하였다.

최고의 제작진으로 교체하면서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대당
1백파운드나 되는 적자로 부도의 위기까지 이르게 됐다.

이에 채프만의 천부적인 사업수완이 발휘됐다.

또한번 조립제품 세트로 차를 발매함으로써 가격파괴를 이루어 64년까지
그동안 쌓였던 재고를 처치하면서 1천여대 정도를 팔수 있었다.

김상권 <현대자동차 승용제품개발 제2연구소장>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