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간의 정치/경제적인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북한은 한국과 미국이 제안한 4자회담에 대해 6개월이 다돼가는 지금까지
일언반구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나진/선봉지구를 열어 놓고 서방에 미소를 보내는 한편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등 과거와 다름없는 무모한 도발행위를 일삼는 양동작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사의 초청으로 내한한 호르스트 텔칙 전 독일 헬무트 콜총리의
외교안보 보좌관은 "이럴 때일수록 한국은 냉정을 유지하고 인내하며 평화적
인 통일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텔칙박사는 특히 "남북의 통일시점은 누구도 쉽게 가늠할수 없기 때문에
통일관련 책임자들은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일통일 경험에 비추어 볼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주변국들과
의 탄탄한 우호선린관계 유지"라며 러시아 일본도 한반도문제 논의에 당사자
로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독일통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콜총리의 등뒤에서 현장에 참여했던 경험을
''329일''이라는 저서를 통해 우리에게 소개한 텔칙박사는 2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본지 창간 32주년을 맞아 ''독일통일의 경험과 한반도통일에
대한 제언''이라는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본지 양봉진 국제1부장이 조선호텔에서 그를 만나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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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봉진 부장 =세계적인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은 잠수함과
무장공비를 침투시키는 등 돌출행동을 일삼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행동를 보고 느끼는 것이 많으리라 여겨지는데.

<> 호르스트 텔칙 박사 =이것은 분명한 침략행위다.

북한은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정부는 이 기회에 누가 침입자인지를 명확하게 알릴 필요가 있다.

한국정부는 또 북한에 평화적 해결방안을 지속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 양부장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면.

<> 텔칙박사 =독일의 통일경험을 한국에 무조건 대입시킬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이 독일의 경험들을 잘 이모저모 원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본다.

국민들과 주변국들에게 서독이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체제의 유일한
대안이라는 인식을 심어줬듯이 한국도 민주적이고 시장개방적인 자유국가임
을 국제사회에 인식시켜 북한과의 차별성을 부각시켜야 한다.

또 한국이 언제든지 북한과 대화할 자세가 돼있다는 점도 널리 알려야
한다.

대립이 아닌 화해정책을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에다 서독이 서방우방국들과의 굳건한 협력을 통해 "독자적" 안보체제
를 유지한 것도 중요한 경험으로 삼을만하다.

서독은 지난 80년대 소련의 위협에 대응, 퍼싱등 미국의 핵미사일을 자국
영토내에 배치키로 과감히 결정했다.

이는 미국의 도움을 얻어 스스로를 방위하겠다는 결연한 "안보의지"를
과시한 중요한 결정이었다.

특히 50만명에 달하는 서독국민들의 핵미사일 배치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내린 조치였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었다.

<> 양부장 =통독전 서독과 동독및 미국 영국 프랑스 구소련 등을 포함하는
2+4회담은 독일 통일여건 조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안다.

올해초 한국도 북한 미국 중국을 엮는 4자회담을 북한에 제의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을 빼고 미국과 중국만을 당사자로 포함시킨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도 많았다.

특히 러시아의 섭섭함은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2+4가 아닌
2+2형식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 텔칙박사 =4자 회담 당사자중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과 미국의
원활한 관계다.

이들의 관계가 매끄러워야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서독도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통일정책을 폈다.

물론 한국은 미국 중국 이외에 러시아와 일본도 중시해야 한다.

남북한 통일을 위해서는 이들 국가들의 동의 또한 필요하다.

통일전 서독은 러시아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통일된 독일이 이웃
나라들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을 심는데 주력했으며
이같은 노력이 주효했다고 본다.

한국도 통일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에 잠재적인 위협대상으로 비쳐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 양부장 =헬무트 콜 독일총리는 최근 옐친 러시아대통령을 방문해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등 돈독한 개인적 관계를 과시해 왔다.

유엔 가입 지원을 바라며 한국도 러시아에 30억달러에 달하는 경협자금을
지원하는 등 관계를 터왔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고 앞으로도 그런 상태는 쉽게
바뀌지 않으리라 본다.

여러 측면에서 러시아가 우리를 필요로 했다기 보다는 우리가 러시아에
기대했던 것이 더 많았다는 것이 솔직한 표현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이 이루어진 마당에 러시아를 4자회담
테이블에서 배제한 것이 과연 현명한 결정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 텔칙박사 =4자회담의 성사여부는 전적으로 북한의 상황에 달려 있다.

말씀하신 것처럼 러시아의 역할과 중요성을 고려할 때 당연히 러시아도
대화 테이블에 포함돼야 한다.

그러나 그 시점은 별개의 문제로 다루어질수 있다.

2+2회담을 통해 어느정도 기반이 다져진 이후 러시아와 일본이 대화테이블
에 참여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수는 있다.

<> 양부장 =왜 북한이 2+2회담에 응하지 않는다고 보나.

<> 텔칙박사 =북한체제는 권력이양기에 놓여 있다.

권력체제가 확실히 다져지지 않아 운신폭이 좁은데다 경제붕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러한 때 남북간의 대화는 북한의 개방을 의미한다.

개방은 곧 지도체제가 불분명한 상황에서 곧 체제붕괴로 이어진다.

북한은 바로 이점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 양부장 =북한의 군사적인 행동이 남북한과 주변국들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는가.

<> 텔칙박사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등 주변국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다.

주변 어느 국가도 북한의 군사적 도발을 원치 않으며 북한의 군사적 행동은
한국에 유리한 상황만 만들어 줄 것이다.

<> 양부장 =중국은 주변국들중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동시에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간의 대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중국의 입장과 역할은.

<> 텔칙박사 =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를 희망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과도
마찰을 원치 않고 있다.

경제개발 등 중국 국내문제가 산적해 있는 탓이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지원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잘 이용해야 한다.

<> 양부장 =독일 통일과정과 통일 이후 독일의 모든 통일관련정책들이
바람직했다고 평가하는가.

다시말해 독일이 뭔가 잘못 생각했던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을 들 수
있겠는가.

<> 텔칙박사 =모든 결정들이 제대로 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

단지 통일 이후 동독을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 급속하게 서독식으로
변화시키려 했던 점은 무리였다고 본다.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 것은 당연했다.

동독경제를 서독수준으로 일으키기 위해 동독지역에서 재산사유화정책을
실시한 것은 다소 빠른 감이 없지 않았다.

좀더 유예기간을 두고 사유화를 제도화시켜야 했었다.

정치적으로는 바람직한 결정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다소 문제가 있는
결정이었다.

<> 양부장 =과도기를 위해 동독에 과도자치정부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어야
했다는 뜻인가.

<> 텔칙박사 =89년말 서독 콜정부는 동독과의 통일이 적어도 5~10년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동독이 예상외로 일찍 무너져 버렸다.

동독에 과도정치체제를 수립, 동독을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완전한 통일을
달성하려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방법은 되지 못했다.

환상에 그쳤을 뿐이다.

수십만명의 동독사람들이 서독으로 몰려들어 주택 고용 사회복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결정이 마르크화로 동서독 통화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동서독 통화가 1대1로 통합돼 더 이상 동독지역 사람들이 서독으로 쇄도
하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였다.

이같은 독일의 경험은 한국에 좋은 시사가 될 것이다.

통일이 된다면 한국도 비슷한 상황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이외 어느 국가가 북한을 감싸안을 것인가.

주변의 어느 국가도 정치 경제적으로 북한문제에 개입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만의 문제가 될것이다.

<> 양부장 =동 서독 통화를 1대1 통합한 것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됐는데.

<> 텔칙박사 =다시 강조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잘못된 결정이었지만 정치적
으로는 옳은 결정이었다.

통일전 동독경제는 코메콘(동유럽경제상호원조회의)에 의지, 수출량의
80%가 러시아에 집중됐다.

러시아도 동독기업들과의 그같은 관계유지를 절실히 원했다.

동독과의 교역관계가 중단된다면 당장 피해를 입는 쪽은 러시아 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된 후 동구권국가나 러시아는 더 이상 동독제품에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이들 국가들은 수입대금으로 경화를 지불할 바에야 질좋은 서독제품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구동독지역 기업들은 이들 국가와 무역관계를 어쩔수 없이 중단해야
했다.

마르크화를 통합하기전에 이점을 우리가 미리 간파하지 못했다.

그래서 통독정부는 동독의 공기업들을 서둘러 민영화하기로 했던 것이다.

<> 양부장 =통일국가로서의 독일이 미.영.불.소 등 4대강국은 물론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등 주변국에 잠재적 위협존재로 인식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으며 같은 맥락에서 유럽연합(EU) 창설을 주도했다.

이런 노력이 제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 텔칙박사 =매우 성공적이었다.

주변국가들은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있다.

우선 독일통일자체가 평화적이었는데다 주변국 모두가 독일 통일에 반대
하지 않았다.

이들은 일말의 부담감도 느끼지 않았다.

통일후 독일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으로 계속 남아 프랑스와
함께 유럽연합(EU) 창설을 주도했다.

네덜란드 등 주변국들도 이같은 연합체 속에서 통일독일을 상대하길 바랐다.

<> 양부장 =통일 이후 독일경제는 고실업 등으로 악전고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되리라 보나.

<> 텔칙박사 =독일통일후 매년 1억5천만마르크가 통일비용으로 지출돼
재정적자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

또 지난 93년에는 2차대전 후 최대의 경기침체를 겪기도 했다.

게다가 한국 대만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신흥 경제부상국으로부터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이에 따라 독일정부는 민영화 기업구조 재조정 등을 통해 전면적인 경제
재편에 들어갔다.

독일경제는 조만간 본격적으로 회복세를 보일 것이다.

<> 양부장 =세상만사가 결국은 몇몇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독일 통일도 그 과정에서 누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누가 독일통일에 가장 크게 이바지했다고 보나.

<> 텔칙박사 =단연 헬무트 콜 독일총리를 들 수 있겠다.

그는 적당한 시기에 정확한 판단력으로 독일통일을 주도한 용기있는 인물
이다.

그 다음으로는 고르바초프 전소련대통령을 꼽을 수 있다.

독일 통일에 쓸데없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끝까지 지킨 지도자다.

조지 부시 전미국대통령도 큰 기여를 했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콜총리를 아낌없이 지원했기 때문이다.

<> 양부장 =똑같은 논리로 한국통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해야할 사람들이
있다.

누구라고 보는가.

<> 텔칙박사 =당연히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가장 중요하다.

남북한의 통일도 결국 각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얼마나 친밀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일일수 있다.

< 정리=김홍열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