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이래 최저금리시대라던 지난 4월 H은행.

거래처인 H자동차직원과 은행직원간에 승강이가 벌어졌다.

"12%로 6개월간 돈을 더쓰기로 이미 약정해놓고 금리가 떨어진다고 지금
계약을 깨자고요.

이러면 정말 재미없습니다"

"금리가 앞으로 한자리수로 갈게 뻔한데 12%짜리 대출을 어떻게 씁니까.

그것도 장기대출을요.

장기차입금 전액을 상환하겠습니다"

당시 금리는 10%대.

이례적인 저금리였다.

게다가 통화당국은 통화를 탄력적으로 공급하겠다고 굳은 약속까지 하고
있었다.

H자동차가 한자리수 금리를 확신할 수 밖에.

H자동차를 예로 들긴했지만 다른 대기업들도 대부분 그랬다.

비싼 금리로 빌린 장기차입금을 모두 갚는 자금전략을 썼다.

금융기관과의 사전약속(옵션)마저 "감히" 저버리는 호기마저 부리면서.

이때 자금운용에 애를 먹던 은행들은 가계대출을 대폭 늘렸다.

이러다보니 한국은행에 내는 지불준비금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대출
세일을 해댔다.

그러자 한은은 지준부족이 많은 은행에 전화로 한마디씩 했다.

"지준관리 좀 하시오"

한은의 이 한마디에 은행들은 갑자기 자금을 당기기 시작했다.

그때는 마침 신탁제도를 개편해 은행신탁에 있던 자금이 고유계정(은행
계정)으로 들어가면서 통화수위가 높아졌다.

은행들은 한은이 통화수위를 낮추기 위해 곧 통화환수를 할 것이라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몰라도 한은은 국제수지적자가 커지면서 환율이 오르자 달러를
팔고 원화를 거두어들였다.

사실상 통화환수였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재경원과 한은은 언론에 플레이를 계속했다.

"통화환수는 없다.

탄력적으로 공급하겠다"고 녹음기를 틀어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재정경제원은 투신사에 전일 종가이상으로 채권은 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통화당국이 겉으로는 통화탄력공급을 외쳐도 속으로는 통화를 흡수할
것이라고 믿은 금융기관들은 돈줄을 더 죄었다.

금리는 다시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H자동차에 비상이 걸렸다.

금리가 떨어질 것으로 믿고 장기대출금을 다 갚아버렸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돈쓰랄때 돈안쓰고 차입금을 갚아버린 "괴씸죄"때문에 은행에서는 냉대를
받은 것은 물론이다.

급한대로 어음할인으로 자금을 변통하기도 했었다.

통화당국의 방침과 전망을 순진하게 믿은 "죄과"를 치룬 것이다.

이러다보니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성이 생길리 없다.

통화당국이 탄력적으로 자금을 푼다고 발표한날 금리가 오르기 일쑤다.

통화당국에 대한 불신때문이다.

통화당국이 불신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무능하다거나 속이 음흉해서가
아니다.

제도적 한계때문이다.

통화량을 재는 잣대가 현실과 동떨어져있기 때문이다.

M2라는 작은 잣대로 자금흐름을 재기때문이다.

M2(총통화)는 약1백60조로 총금융자산의 25%수준에 불과하다.

"고기(경제주체)가 사는 댐(경제)에 물(통화)을 제대로 넣어주어야
합니다.

물고기 수가 증가하거나(경제성장) 체중이 늘어나는데(물가상승) 물이
모자라면 고기가 영양부족으로 죽고(경기침체) 너무 많이 넣어주면 물이 댐
밖으로 흘러넘치게(경기과열)됩니다.

그런데 댐의 수량을 재는데 쓰는 자(M2)가 너무 작습니다.

차라기 적정산소량(금리)을 보고 물을 공급하는게 적절할 겁니다"(A종금
K이사)

물론 한은은 이같은 지적에 따라 통화량관리에 총통화(M2)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최근에는 MCT(총통화+CD+신탁)라는 지표도 같이 보고 통화를 적절히
공급한다고 밝히고 있긴하다.

하지만 금융계는 한은이 M2를 여전히 신봉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불신이 신뢰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은도 고민의 일단을 내비친다.

"왜 우리를 안믿을까"

고민에 대한 답은 한은이 "샤워실의 바보"이기 때문이다.

샤워실의 바보란 밀튼 프리드만교수가 정부정책의 난조현상을 비꼰
말이다.

알맞은 온도로 샤워를 하자면 온수와 냉수꼭지를 적절히 조절한 뒤 잠깐
기다려야 한다.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는게 샤워실의 바보다.

뜨거운 물이 나오면 샤워실의 물꼭지를 찬물쪽으로 튼다.

찬물이 나오면 너무 차다고 물꼭지를 또 반대편으로 돌린다.

그결과 샤워실의 바보는 적정온도의 물로 목욕을 하지 못한다.

오늘은 풀고 내일은 당기는 "온탕냉탕"식 통화정책을 펴는 한은-.

그결과 금리는 높아졌다 낮아졌다, 들쭉날쭉한다.

국민들이 샤워실의 바보를 어떻게 믿겠느냐는 말이다.

우리의 경쟁대상국으로 떠오른 말레이지아의 중앙은행에서 최대행사는
"미스중앙은행"을 뽑는 일이라고 한다.

통화정책은 이미 다 알려져있고 연초에 발표한 대로라 더 들여다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샤워실의 바보가 사라지면 한국은행에서도 미인선발대회를 열수 있을
텐데.

< 정리=안상욱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9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