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옥자 <서울대 교수>

방학이 되면 전공이 아닌 세계에 뛰어들기를 좋아한다.

소설읽기도 그중 하나이다.

거기에는 학문의 세계와는 다른 기쁨과 위안이 있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또 결과적으로는 전공을 보완하여 살찌우게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방학에 제일 먼저 손에 든 책이 이승우씨의 "사랑의 전설"
(문이당간)이다.

양귀자씨의 "천년의 사랑"을 눈물을 펑펑 쏟으며 읽은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던터라 감성훈련을 위해서라도 한번쯤 사랑이야기를 읽자고
마음먹었다.

러브스토리야말로 문학의 영원한 주제중의 하나임을 누가 부인하랴.
"사랑의 전설"은 작가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옛날애인"이 화두다.

젊은날에 운명처럼 만나 사랑하던 연인들이 젊음의 치기와 열정을
못이겨 사소한 오해로 헤어지고 각기 옛애인을 잊지 못하며 살아간다.

여자는 결혼은 했지만 황폐한 삶을, 남자는 독신으로 소설을 쓰며
산다.

닿을 듯 닿을 듯한 인연의 끈은 맺어지지 않고 결국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는 여자가 자신을 변함없이 끝까지 사랑했음을 여자의 친구를
통해 확인하는 남자의 비통한 심정을 "나"라는 화자는 직접화법으로
적어나간다.

각 장의 제목도 없다.

새로운 장이 시작될 때마다 그 내용을 암시하는 듯한 연시나 소설.철학서
등 여러 책에서 음미할만한 사랑에 관한 명상이나 구절들을 예시하여
소설읽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고급스런 느낌마저 든다.

평소 무거운 주제를 즐겨 다루는 작가답게 사랑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분석하려는 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전반적인 서술구조가 젊은날을 추억하는 것이어서 나이든 이에게는
지난 세월을 회상해보는 계기도 된다.

작가가 사랑의 행동보다는 사랑의 감정이 우선한다는 전제로 본질적이고
순수한 러브스토리를 염두에 두고 썼다는 이 소설은 아름답고 고전적인
사랑이야기이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