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기업들은 이렇게 철저히 전문화돼 있다.
한 업체가 안경테를 만들면 다음 업체는 도금을 하고 그 다음 업체는
나사를 조이는 식이다.
이탈리아에는 이렇게 중소기업간 공정을 묶어 제품을 기획하고
최종생산해내는 기업이 따로 있다.
바로 오거나이저(Organizer)기업이다.
이탈리아 중소기업은 오거나이저를 중심으로 촘촘한 네트워크로 짜여
있다.
세계 최대의 의류산지인 이탈리아 북부 코모지구의 오거나이저
랏티사를 보자.
랏티사는 넥타이 카프 여성의류등의 생산을 총괄하는 기업.
랏티사는 제품을 디자인한뒤 무늬의 프린트는 카이로리사, 의류 봉제는
에로에사, 넥타이 봉제는 엣세사에 각각 맡긴다.
이탈리아의 구치, 프랑스의 크리스찬디올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넥타이와
스카프도 랏티사의 네트워크를 거쳐 생산되는 제품들이다.
공정별 전문업체와 오거나이저기업간 관계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품질이 떨어지거나 원가가 높다고 판단되면 오거나이저기업은 언제라도
네트워크를 새로 짠다.
기술을 쌓지 않으면 거래는 단박에 중단된다는 얘기다.
이런 긴장관계가 이탈리아 중소기업의 장인정신을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는 셈이다.
카이로리사만 봐도 알수 있다.
중학교 졸업학력이 전부인 이회사의 카이로리사장은 사진제판기술
CAD(컴퓨터 디자인)시스템 워크스테이션등 그때그때 첨단기술을 앞장서
도입했다.
"프린트는 전통공예가 아니라 최신기술을 집대성한 것"이라는게
카이로리사장의 지론이다.
사방 1cm 크기에 열가지 이상의 색을 사용하면서 오차없이 색깔을
뽑아 프린트하는데는 기능공의 경험과 첨단기술 모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동남아시아산 저가제품공세에 밀려 침체기에 빠져들었던 카로비지역
니닛트업도 80년대 후반 니트업체 조합인"CITER(치테르)"를 설립, 재활에
성공한 사례다.
CITER는 우선 이 지역 1,000여개 기업을 분업체제로 재편했다.
오거나이저기업과 모사 짜는 기업, 재단및 봉제기업, 자수놓는 기업들로
나눈뒤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CITER는 구조전환을 지휘하는 한편 회원기업으로부터 회비를 거둬
신기술과 디자인개발, 생산성향상등의 연구비로 썼다.
밀라노와 파리에 연구원을 파견, 최신 유행디자인을 연구하고 품질관리
기법을 배운뒤 이를 오거나이저 기업에 보고해 제품을 혁신시켰다.
경쟁과 단결의 원리속에서 꾸려지는 이런 이탈리아 중소기업의
네트워크가 이탈리아 경제를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중소기업의 또다른 특성은 "가족 경영"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후대기업으로의 구조전환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사회주의정권의 등장으로 노동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숙련노동자들이
독립해 기업붐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정책 부재도 또한 가족경영의 끈을
강화하는데 일조,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구치니 그룹은 이탈리아식 가족경영의 전형.
지난 38년 가정용품 업체로 출발한 구치니 그룹은 현재 4개 기업으로
분할돼 형제 6명 전원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남 조바니는 실내장식업, 차남 비르지리오는 제트바스(마사지 효과가
있는 욕조)제조업, 막내 아드루포는 조명회사를 각각 맡고 있다.
특히 차남이 경영하는 테우코사는 유럽 최대 제트바스 업체로 성장했다.
이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종류는 무려 151종.
철저한 다품종.소량 생산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300억리라.
종업원수 350명이다.
그러나 형제가 독자적인 경영에 성공했다는게 이 그룹의 첫째 특징은
아니다.
구치니 그룹의 최대 특징은 독특한 차세대 경영자 육성 시스템에 있다.
구치니 그룹의 여섯 형제에게는 18명의 자녀가 있다.
이들은 14세가 되면 구치니 그룹의 "주니어 이사회" 회원이 된다.
이들은 부모들의 기업에 대해 영업과 개발, 생산등을 주제별로 정기
보고할 의무를 가진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곧장 "실천적 경영수업"단계로 들어가는셈이다.
주니어이사회에서는 자녀들중 경영 유망주들을 선별해 내는 장이기도
하다.
이 주니어 이사들사이에는 부모가 경영하는 기업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대신 삼촌들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한다.
여기서도 강도높은 경영수업은 이어진다.
경쟁의 원리는 이탈리아 기업들의 가족경영에까지 도입되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를 돌리는 중소기업의 굳건한 장인정신의 기초에는
이같은 경쟁과 단결의 시스템이 놓여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