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성공했다] 조순조 <부일머티리얼공업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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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가격 1원, 연간매출은 167억원.
어떤 업종에서 가능한 얘기일까.
가방액세서리 분야이다.
부일머티리얼공업.
이회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가방 핸드백 업계에선 "모르면 간첩"이다.
국내 가방메이커 치고 이회사의 부자재를 쓰지않는 업체는 없다.
미국 샘소나이트와 하트만, 일본 에이스등 외국 유명메이커들도 BIM 마크가
찍힌 부일 부자재를 선호한다.
부일은 이분야 국내 최대메이커이다.
24년간 이회사를 일군 장본인은 놀랍게도 여성기업인이다.
조순조사장(50).
대부분의 여성기업인들이 남편사별 등의 이유로 사장직을 승계한데 비해
조사장은 자수성가 케이스다.
제약회사를 6개월 다니다 뭔가 해내야만 한다는 본능적 욕구를 쫓아 26세의
창창한 나이에 부일 간판을 내걸었다.
"단한차례의 부도위기 외에는 줄곧 앞을 향해 내달려온 것 같아요"
조사장은 10년전 부도위기 순간을 회고한다.
믿고 거래하던 일본 바이어가 중국에 공장을 세우면서 현지조달한다며
주문을 끊어 좌초할 지경에 봉착했다.
다행히 때마침 주어진 미국쿼터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후 오기가 생겨 다른 일본 바이어와 손잡고 활발한 거래를 펼치자
등돌렸던 그 바이어가 다시 거래재개를 희망해 왔다고 한다.
부일이 서울 성수동과 경기 안산공장에서 만드는 액세서리는 50전에서
수천원대까지 모두 3,000여종에 이른다.
아일릿(고정핀)등 1원짜리가 수두룩하고 특허품도 있다.
부일은 저가품이지만 고급품으로 만들기 위해 10년전부터 컴퓨터설계
방식을 채택하는등 남보다 한발 앞서 왔다.
조사장의 사업에 대한 열의는 실로 대단하다.
부일이 경공업 호경기를 타고 뻗어가자 6년만에 가방업체 애사실업을
세웠고 3년전 한일합작법인인 한국에이스를 설립, 건실하게 운영해 오고
있다.
애사실업은 도입브랜드 펠레보르사와 자가상표 미즈루이스의 가방류를
주요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한국에이스는 일본 에이스 브랜드를 도입하면서 라이선스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
3년전 중국 상해에 설립한 한.중.일 합작법인 상해애부직대유한공사는
조사장 스스로가 자랑하는 회사이다.
가방부자재를 생산하는 이공장은 첫해부터 흑자를 내면서 지난해 종업원
150명으로 150억원의 매출을 실현, 부일은 7,500만원의 이익을 배당받았다.
현지진출 일본바이어등을 확고히 잡은 덕택이다.
사업하기 어렵다는 이분야에서 이회사가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진솔하고 부지런한 조사장의 멘탤리티가 그 바탕이다.
바로 프로근성이다.
"까다롭고 힘든 바이어를 설득시켜 오더를 따낼 때의 희열은..."
"90%의 좌절보다 10%의 승리에 산다"
그의 말이다.
영어 일어 중국어로 바이어와 상담할 정도가 되고 독서광이어서 화젯거리가
풍부한 점도 사업밑천이다.
시대흐름을 잘 간파한 순발력과 결단력도 주효했다.
사업초창기에는 90%를 수출했으나 지금은 수출이 60%, 나머지는 국내 OEM
(주문자상표부착생산)공급및 유통으로 안정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100% 자체생산에서 50%는 외주가공으로 전환한 것도 납기준수를 가능케한
요인이다.
조사장은 일이 재미있고 사람 아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지구촌 곳곳을 누비다보니 요즘엔 새로운 욕심이 생겨난다고.
부일을 가방장식업계 세계 선두주자로 키우고 싶은 강렬한 욕구 때문인지
그의 발걸음은 공장내에서도 총총하기만 하다.
< 문병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0일자).
어떤 업종에서 가능한 얘기일까.
가방액세서리 분야이다.
부일머티리얼공업.
이회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가방 핸드백 업계에선 "모르면 간첩"이다.
국내 가방메이커 치고 이회사의 부자재를 쓰지않는 업체는 없다.
미국 샘소나이트와 하트만, 일본 에이스등 외국 유명메이커들도 BIM 마크가
찍힌 부일 부자재를 선호한다.
부일은 이분야 국내 최대메이커이다.
24년간 이회사를 일군 장본인은 놀랍게도 여성기업인이다.
조순조사장(50).
대부분의 여성기업인들이 남편사별 등의 이유로 사장직을 승계한데 비해
조사장은 자수성가 케이스다.
제약회사를 6개월 다니다 뭔가 해내야만 한다는 본능적 욕구를 쫓아 26세의
창창한 나이에 부일 간판을 내걸었다.
"단한차례의 부도위기 외에는 줄곧 앞을 향해 내달려온 것 같아요"
조사장은 10년전 부도위기 순간을 회고한다.
믿고 거래하던 일본 바이어가 중국에 공장을 세우면서 현지조달한다며
주문을 끊어 좌초할 지경에 봉착했다.
다행히 때마침 주어진 미국쿼터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후 오기가 생겨 다른 일본 바이어와 손잡고 활발한 거래를 펼치자
등돌렸던 그 바이어가 다시 거래재개를 희망해 왔다고 한다.
부일이 서울 성수동과 경기 안산공장에서 만드는 액세서리는 50전에서
수천원대까지 모두 3,000여종에 이른다.
아일릿(고정핀)등 1원짜리가 수두룩하고 특허품도 있다.
부일은 저가품이지만 고급품으로 만들기 위해 10년전부터 컴퓨터설계
방식을 채택하는등 남보다 한발 앞서 왔다.
조사장의 사업에 대한 열의는 실로 대단하다.
부일이 경공업 호경기를 타고 뻗어가자 6년만에 가방업체 애사실업을
세웠고 3년전 한일합작법인인 한국에이스를 설립, 건실하게 운영해 오고
있다.
애사실업은 도입브랜드 펠레보르사와 자가상표 미즈루이스의 가방류를
주요 백화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한국에이스는 일본 에이스 브랜드를 도입하면서 라이선스 생산을 추진하고
있다.
3년전 중국 상해에 설립한 한.중.일 합작법인 상해애부직대유한공사는
조사장 스스로가 자랑하는 회사이다.
가방부자재를 생산하는 이공장은 첫해부터 흑자를 내면서 지난해 종업원
150명으로 150억원의 매출을 실현, 부일은 7,500만원의 이익을 배당받았다.
현지진출 일본바이어등을 확고히 잡은 덕택이다.
사업하기 어렵다는 이분야에서 이회사가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둔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진솔하고 부지런한 조사장의 멘탤리티가 그 바탕이다.
바로 프로근성이다.
"까다롭고 힘든 바이어를 설득시켜 오더를 따낼 때의 희열은..."
"90%의 좌절보다 10%의 승리에 산다"
그의 말이다.
영어 일어 중국어로 바이어와 상담할 정도가 되고 독서광이어서 화젯거리가
풍부한 점도 사업밑천이다.
시대흐름을 잘 간파한 순발력과 결단력도 주효했다.
사업초창기에는 90%를 수출했으나 지금은 수출이 60%, 나머지는 국내 OEM
(주문자상표부착생산)공급및 유통으로 안정기반을 구축하고 있다.
100% 자체생산에서 50%는 외주가공으로 전환한 것도 납기준수를 가능케한
요인이다.
조사장은 일이 재미있고 사람 아는 것이 즐겁다고 한다.
지구촌 곳곳을 누비다보니 요즘엔 새로운 욕심이 생겨난다고.
부일을 가방장식업계 세계 선두주자로 키우고 싶은 강렬한 욕구 때문인지
그의 발걸음은 공장내에서도 총총하기만 하다.
< 문병환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