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여의도지점 이윤희씨(27)는 요즘 회사를 그만둘까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하는 일도 재미없고 더이상 비전도 없다는 생각이 부쩍 들어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지난해 은행에 낸 외환업무 연수 신청이 여태껏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후 바로 은행에 입사한 이씨가 지난 4년간 줄곧 해온 일은
고객들의 예금을 받아 처리하는 수신업무(텔러업무).

경제학을 전공한 그녀는 원래 외환관련 업무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작년말 외환업무 연수를 신청했다.

하지만 여태 은행측에선 무응답이다.

같은 지점의 남자직원들 중에선 이미 3명이나 외환업무 연수를 받고 돌아와
업무를 바꿨지만 자신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다.

본점의 연수프로그램상으론 분명히 교육을 받을 자격을 갖췄지만 지점장은
"수신업무를 맡을 인원이 부족하다"며 말린다.

내놓고 말은 하지 않지만 "여자가 뭘..."하는 눈치다.

사내교육이나 연수등 각종 재교육 프로그램에서 여성이 상대적으로 소외
받는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이 어엿한 일꾼으로 성장하는 걸 막는 족쇄라는 점에서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문제다.

직장내 재교육 프로그램은 단순한 업무교육 차원을 넘어 제몫의 일꾼으로
성장하는 필수 코스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차별"은 의외로 신입사원 교육때부터 나타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47개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신입 여사원
은 주로 교육일수 1주일 이하의 단기교육(53.2%)에 치중돼 있는 반면 남자
사원은 3주일 이상의 장기교육(37.2%)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은행원들이 2~3주 과정으로 다양한 내용의 교육을 받는 금융 연수원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일반직원들의 교육과정에서 여성 피교육자의 비율은 5~10%에 불과하다.

시중은행의 여성인력 비율이 50%에 달하는 것에 비해 크게 낮은 수치다.

관리직 교육과정에선 아예 여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 내용으로 들어가면 남녀간 차이는 더욱 심해진다.

여성의 경우 전산과 일반소양분야에 교육이 집중돼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교육훈련 부문별로 남녀비율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교육중 전산및 일반소양분야 교육의 비중은 여자가 42.5%로 남자보다
13.9%포인트 높다.

반면 어학교육과 관리자교육의 비중은 각각 6.8%, 6.1%로 남자의 10.2%,
19.0%에 크게 못미친다.

또 예절.친절교육 소양교육 전산교육등이 주로 여사원만을 대상으로 시행
되고 있는 반면 직무관리교육 직급별 직능교육 승진대상자교육등은 대부분
기업에서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단순한 교육시간의 차이 이상의 성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육기회의 차별이 곧 부서배치의 불이익으로 연결
된다는 것.

창조적이고 다양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재교육 프로그램이 여사원들에게
제공되지 않다보니 주로 단순반복적인 일에 매달리는 결과를 낳는다.

"같은 전공 출신 신입사원들이라도 성별에 따라 주어지는 업무가 다르다.

예컨대 어문계열 졸업자의 경우 남자사원이 해외영업이나 외환등의 업무를
담당한다면 똑같은 전공을 했더라도 여사원에겐 외국 임원 비서직이
주어지는게 일반적"(한국여성개발원 김태홍박사)이라는 지적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승진차별로도 이어진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작성한 "95년도 인간개발보고서"에 나타난 한국
여성의 관리직참여율은 세계 116개국중 112위.

기업내 여성임원비율 역시 최하위권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기업내 재교육프로그램에서의 남녀차별이 오랜기간
누적돼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절한 직무교육을 받지 못해 다양한 업무경험을 쌓지 못하고 승진에서도
누락되는 "악순환"이 구조화돼 있다는 얘기다.

기업의 여성에 대한 교육투자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데는 왜곡된 여사원
관이 큰 몫을 차지한다.

"여사원을 "인적 자원"이라 생각하기 보다는 "사무실의 꽃" 정도로 인식
하는 관리자들이 많다.

여성인력을 제대로 키워 회사의 재목으로 써보겠다는 "투자마인드"가
부족하다"(여성민우회 정양희 사무국장)

물론 최근 일부 대기업에선 여성을 해외주재원으로 내보내기도 하고 출장
등에서도 남녀 차별을 두지 않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다.

여성에 대한 투자기피는 또 여성들의 직업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성에 대한 투자는 낭비"라는 관리자의 인식은 여직원들로 하여금
"열심히 해봐야 헛수고"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 두가지 요인은 상승작용을 통해 그동안 여성의 사회참여를 가로막는
커다란 벽으로 작용했다.

이 와중에서 정작 유능하고 의욕있는 고급여성인력은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었던게 한국의 현실이다.

보다 많은 여성을 뽑는 것도 중요하다.

또 그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뽑아 놓은 여성인력을 어떻게 계발하여 적절히 활용하느냐는 더 큰
과제다.

< 김주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4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