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시인 이시영씨( 47)가 6번째 시집 "사이" (창작과 비평사 간)를
내놓았다.

94년 "무늬"이후의 신작을 모은 이번 시집에는 3행안팎의 짧은 시
89편이 담겨 있다.

죽음과 고요, 우주와 찰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 유독 많은 게 특징.

"열살때 본 풍경이 일생을 지배한다고 합니다.

일상에 쫓길수록 어린시절의 한가로운 농촌정경이 떠오르고 거기에서
평화를 발견합니다.

"궁극"에 대한 개안이라고나 할까요"

나이가 들면서 자주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고 그래서 당도한 세계가
사물과 사물의 "사이"이다.

이는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 지우산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 적막하다" ("사이" 전문)에서 처럼 삶과 죽음,
어제와 오늘, 젊음과 노년의 밑변으로 이어져 빗살무늬같은 삶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는 "적막한" 새벽 2~3시에 시를 쓴다고 얘기한다.

우주의 고요속으로 걸어들어가 어슴프레하고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사물의 형태를 "순간"의 힘으로 잡아내고자 한다고.

이번 시집의 요체는 또 만상의 적요속에서 은은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빛과 미명을 열고 나오는 "발견의 시학"이다.

대부분의 시가 짧고 간결한 것도 그 때문.

초기시집 "만월" 등의 풍만한 이미지가 무형무적의 여백미로 응축돼
나타난다.

이로인해 주위에서 혹 현실의 중심에서 몇발자국 비켜서 있는 것은
아니냐고 묻는데 대해 그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솔직이 그점이 부채감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소리와 빛깔 말고도 소중한 "그늘"들을 거느리고
있지요.

드러나지 않은 것의 무게, "거대한 산문의 시대"와 정면 대결할수 있는
힘도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이씨는 전남구례 태생으로 현재 창작과 비평사 대표이사 부사장,
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등을 맡고 있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