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법 형사합의 30부 김영일부장판사가 "95고합 1280호, 96고합 38호,
96고합 76호, 96고합 127호등 4건의 사건을 병합해 심리하겠다"면서 "피고인
전두환"을 호칭하면서 12.12, 5.18사건에 대한 역사적 공판이 시작됐다.

이날 공판에서 검찰의 인정신문, 변호인단의 모두진술, 검찰의 직접신문이
이어졌다.

[[[ 노씨 신문 ]]]

(김상희 부장검사는 진행상의 편의등을 이유로 들어 전두환 피고인에 대한
신문에 앞서 오후 3시17분부터 노태우 피고인에 대해 검찰신문을 먼저 진행
했다.)


<>.김부장검사 = 하나회는 군내부에서 수경사 30경비단장등 수도권 주요
보직을 대물림하여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노씨 = 대물림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부장검사 = 전두환 피고인과는 육사 11기 동기생으로서 생도때부터
가장 막역한 친구사이였나요.

<>.노씨 = 그렇습니다.

<>.김부장검사 = ''10.26사건''이후 국내 정치상황은 유신 헌법을 개정해
점진적인 민주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79년 11월8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헌법개정을 통한 정치발전을 약속하고, 11월21일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구성돼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헌법질서의 창출이 모색되고 있었지요.

<>.노씨 = 당시 전방사단장이었기 때문에 그 같은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김부장검사 = 79년 11월 중순께 단행된 군인사에서 비정규 육사 출신들이
군요직에 배치되고 정규육사출신의 피고인등이 중심이된 소위 ''하나회''소속
장교들이 배제되었지요.


<>.노씨 =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등 정규육사 출신의 하나회 회원들은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갖게되고 장차 인사상 불이익을 입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요.

<>.노씨 = 그런 사실은 몰랐습니다.

<>.김부장검사 = 정총장을 김재규와의 관련 혐의에 대해 조사한다는 명목
으로 연행, 그 지위권을 박탈하는 한편 군의 정식 지휘계통이 이를 저지할
경우 무장병력을 동원하여 제압함으로써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아닙니까.

<>.노씨 = 아닙니다.

<>.김부장검사 = 10.26사건 이후 정총장이 박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인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다가 김재규와 육군본부로 동행한
사실로 인해 일부 군인들 사이에 정총장이 위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었나요.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79년 10월26일 제 9사단장관사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보안사에 근무하는 누군가로부터 박대통령이 운명하신 것 같다는
전화연락을 받고 10.26사건이 발생한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나요.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같은해 10월27일 새벽 4시께 박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방송
뉴스를 듣고 피고인은 참로들을 불러모아 이 소식을 전하고 전방 경계를
더욱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는 한편, 피고인 휘하에 있는 이문석 대령을
보안사에 보내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계속적인 연락을 취할수 있도록 했지요.

<>.노씨 = 이대령이 당시 연대장으로 나가기에 앞서 잠시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몇차례 연락을 취하도록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이대령을 통해서 합수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10.26사건 수사상황을 간혹 알수 있었고 그에 대한 피고인의 생각을
전보안사령관에게 전할수 있었던 것이지요.

<>.노씨 = 가끔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김부장검사 = 10.26사건 며칠후 정총장으로부터 "각하 빈소에 가서 문상
하는 것을 허락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로 나와 박대통령 빈소에 문상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까.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그것은 나중에 알고보니 전보안사령관이 피고인의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정총장에게 건의해 이뤄진 것이라는데.


<>.노씨 =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김부장검사 = 10.26사건일후 박희도 1공수여단장이 9사단으로 두번 가량
피고인을 찾아와 정총장 연행조사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사실이 있나요.

<>.노씨 =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부장검사 = 당시 합수부 수사1국장으로 12.12사건을 숫가한 백동림씨
는 전피고인에게 정총장이 김재규와 사전공모하거나 법률상 방조라고 볼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고 보고하면서, 다만 총장으로서 대통령 시해현장
부근에 있었으므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용퇴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개진했다는데 알고 있었나요.

<>.노씨 = 모르는 사실입니다.

<>.김부장검사 = 79년 11월중순께부터 피고인은 전두환 황영시 차규헌
피고인등과 간혹 만나 정총장 연행조사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총장이
10.26사건과 관련해 어썬 형식으로든 책임져야 하는데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있으므로 그를 조용히 모셔다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까.

<>.노씨 =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확실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황영시 군단장에게는 그같은 말을 했을
것 같습니다.

<>.김부장검사 = 그럼 수사 실무자로부터 수사개요에 대해 설명을 들은후
전피고인과 정총장연행문제를 논의한 사실이 있나요.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전피고인은 정총장이 박대통령 시해션장 부근에 있었고
이후 행적에 의혹이 있어 어떤 형태로든 조사해야 하는데 현직 계엄사령관
이므로 조사에 어려움이 많아 수사가 부진하다고 하면서 연행과 관련한
협조를 측근 장성들에게 요청했지요.

<>.노씨 = 정총장에 대한 조사를 하지 고서는 수사진행이 어렵다는데는
공감을 했었습니다.

당시 본인은 정총장을 존경했으며 정총장도 본인을 좋아했었습니다.

또한 황영시 유학성소장도 정총장과 친분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따라서 그분을 위해서라도 수사에 협조토록하고 용퇴하시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도 군내부에서 정총장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증폭
되어 사기가 저하되고 있다면서 전사령관의 정총장 연행계획에 동의했나요.

<>.노씨 = 연행이라기보다는 모셔오자고 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이 전피고인의 정총장 연행계획에 동의한 것은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에 성역이 있을수 없다는 소신에서 비롯됐나요.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전피고인과의 사이에 12월12일 정총장을 연행하고 황영시
1군단장을 책임지고 모셔오기로 약속했나요.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신현확씨가 당시 국무총리로 내정됨에 따라 개각 전날인
12월12일 정총장을 연행하면 수사는 수사대로 완결되고 육참총장의 자연스런
교체가 가능하여 군의 신뢰와 단결을 가져올수 있다는 판단때문은 아닌가요.


<>.노씨 = 본인은 모른는 일입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합수부 수사관이 정총장을 연행해 오면
합수부장과 의논해 총장용퇴와 수사협조에 대한 설득작업을 할 복안을 갖고
있었나요.

<>.노씨 = 예.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같은해 12월9일 오전 9시계 이상규 2기갑여단장
을 9사단장실로 불러 함께 정국을 걱정하는 대화를 나눈 사실이 있나요.

<>.노씨 =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당시 주변의 지휘관들이 많이
왔었기 때문에 아마도 왔을 것입니다.

<>.김부장검사 = 그날 9사단장실에서 이상규 2기갑여단장을 만난 목적은
정총장 연행조사건에 대한 의중을 떠보고 유사시 병력출동을 요청하기 위한
서전포석이 아닙니까.

<>.노씨 = 기억이 없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같은해 12월9일 오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1군단장 관사로 황영시피고인을 찾아가 귀대신고를 했나요.

<>.노씨 = 아마 했을 것입니다.

<>.김부장검사 = 그 자리에서 황영시 1군단장에게 전합수본부장으로부터
들은 정총장 연행조사계획을 설명해 주면서 12월12일 오후 6시30분께
수경사 30경비단장실에 함께 가겠느냐고 제의했고 그도 흔쾌히 이를
승낙했다는데.

<>.노씨 = 그런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정확한 시간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부장검사 = 그날 30경비단장실에는 피고인과 황영시 1군단장외에도
유학성 군수차관보, 차규헌 수도군단장, 박준병 20사단장, 박희도
1공수여단장, 최세창 3공수여단장, 장기오 5공수여단장, 백운택
71훈련단장, 장세동 30경비단장, 김진영 33경비단장 등이 모였나요.

<>.노씨 = 기억이 없습니다.

<>.김부장검사 = 30경비단에 모인 장성들의 면면을 보면 그들중 유학성
국방부군수차관보, 항영시 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등은 유사시
중도파에 있는 장성들을 설득하거나 반대측에 있는 장성들을 위엄으로
제압할수 있는 군원로들이며 박준병 20사단장은 서울시내 계엄군으로
출동한 전투병력이 주둔하고 있어 병력동원이 용이할뿐아니라 만약
위부대가 육군 정식지휘계통의 지시에 따라 출동할 경우 피고인 등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수 있는 지휘관이고, 1군단 예하부대로서 서울지역
충정부대의 하나인 9사단의 사단장인 피고인과 1, 3, 5공수여단의 여단장인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등은 유사시 서울지역에 곧바로 부대를 출동시킬수
있는 부대장들이었지요.

<>.노씨 = 당시 정총장을 설득하기위해 황영시 유학성중장과 본인만
모일 것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그날 30경비단에 모인 장성들은 대부분이 하나회
회원이거나 피고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이었나요.

<>.노씨 = 아닌 사람도 있었습니다. 황영시 등을 비롯한 선배들과
최세창 장기오 조홍 등은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습니다.

(이때 전두환피고인의 변호인인 전상석변호사는 재판부에 "전피고인의
건강이 우려된다"며 휴정을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지금 휴정은 불가능하다"면서 전피고인에게 10분간 퇴정시켜 휴식을
취할수 있도록 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은 그날 피고인과 함께 30경비단에 온 피고인
황영시외에도 피고인 유학성 차규헌이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한다는
사실은 사전에 알고 있었나요.

<>.노씨 = 알고 있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어떤 경위로 알게 됐습니까.

<>.노씨 = 12월7일 전두환합수부장과 아야기하던 중에 정승화총장 연행에
대해 주요지휘관들을 설득하기로 했으며, 본인은 황영시군단장과
연락해서 함께 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김부장검사 = 피고인과 유학성 황여시 차규헌 등은 정승화총장과
평소 가까운 사람들로서 합수부측에서 정총장을 연행하여 모시고 오면
총장용퇴와 수사협조를 설득하기 위하여 그곳에 모였나요.

<>.노씨 = 그렇습니다.

<>.김부장검사 = 12일 오후 6시40분께 장세동피고인이 30경비단장실에
모인 장성들에게 모임의 취지를 설명하고 정승화총장 연행재가를 받기
위하여 총리공관에 가있으며, 허삼수.우경윤피고인 등이 이미 총리공관으로
출발한 사실을 알려준 사실이 있습니까.

<>.노씨 = 그렇습니다.

<>.김부장검사 = 장세동피고인이 "합수부장의 조치가 옳았다는 것을
측면에서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까.


<>.노씨 =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부장검사 = 결국 정총장이 단순히 연행에 응하지 않고 정총장의
추종세력이 합수부측을 반란세력으로 규정, 병력을 동원해 공격할 경우
피고인을 비롯한 30경비단에 모인 장성들이 자신들의 병력을 동원하여
육본정식지휘계통을 제압하여 달라는 뜻아닙니까.

<>.노씨 =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날 참석해 보니 장세동 대령이
갑자기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라고 상황을 설명, 깜짝 놀랐습니다.
장대령으로부터 그런 보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병력동원 요청은
아니었습니다.

<<< 계 속 ... >>>

(한국경제신문 1996년 3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