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위주의 건설업체로 유일하게 30대그룹에 속해있는 우성건설이 18일
최종 부도처리됨에 따라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지난해부터 건설업체의 부도한파가 중견및 대형사쪽으로 번져가면서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여겨지던 도급순위 30위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20위선
까지 붕괴,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우성건설의 부도는 부동산경기 침체에 따른 수익성악화, 무리한 사업확장,
사업구조조정 실패, 1년가까이 이어진 악성루머, 비자금한파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발생한 것으로 풀이된다.

우성건설 부도는 우선 5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부동산경기침체에서
비롯된다.

특히 91년 5월부터 시작된 이 부동산경기침체는 주택경기침체를 의미할
정도로 대규모 아파트미분양을 양산, 주택사업을 중점적으로 해온 우성에게
치명타가 됐다.

지난해 우성이 2만가구이상의 분양계획을 세웠다가 절반도 분양치 못했으며
이중 1천4백여가구의 아파트가 미분양으로 남아있는게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성건설이 사업구조조정에 실패한 것도 맥락을 같이한다.

우성은 주택경기침체 이후 토목, 해외사업등 건설사업 다변화를 꾸준히
추진해 왔으나 주택사업의 매출액비중이 여전히 90%이상을 차지했다.

매년 일정규모의 사업량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가장 손쉬운 주택사업을
늘리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부동산경기가 하락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90년대초부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면서 부실기업을 인수하거나 미분양택지등을 확보한 것은 우성의
만성적인 자금악박의 근간이 됐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의 미분양사태로 땅에 묶인 돈만 줄잡아 5-6천억원에
이른다.

부산 우동(8천2백여평)과 전포동(7천9백여평) 상업용지 1만6천1백여평에
1억6백억원, 대전 태평동 옛 조폐창부지 4만9천여평에 1천1백억원이 잠긴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밖에 아산 권곡동 6천여평, 군산 월명동 4천7백여평등 자금을 압박해온
미분양토지는 10여곳에 산재해 있다.

게다가 지난 92년 인수한 삼민기업(현 우성종합건설)을 비롯해 조립식주택
생산업체인 용마개발(현 우성공영), 광주 상무대사건에 휘말렸던 청우종합
건설(현 우성산업개발)등 견실하지 않은 5-6개 건설관련업체가 비계열사로
편입됐다.

청우종합건설 인수는 이후 상무대비자금파문에 까지 휘말려 악성루머의
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코레스코를 비롯한 부실콘도를 인수하고 (주)리베라를 통한 해외콘도및
백화점사업, 안성에 주봉골프장사업을 추진하면서 움직일수 없는 고정자금이
잇달아 투입됐다.

자본금에 대한 부채비율이 건설업계평균(4백50%내외)을 훨씬 뛰어넘는
8백%에 육박한 것(95년 상반기현재 7백84%)도 이때문이다.

여기에 지난해 3월 증권시장에 처음 등장한 부도소문이 우성의 "자금줄
죄기"에 불씨를 당겼다.

이후 1년 가까이 법정관리설 오너도피설 부도설이 반복되면서 주식가격은
곤두박질 쳤고 우성은 경영난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담보를 확보하지 않은 제2금융권에서는 루머가 한번 나돌때마다 대출금을
조기회수에 나섰고 효용가치가 크게 떨어진 보유부동산이 자금을 끌어오는
역할을 하지도 못했다.

지난해 우성건설이 부도설이 나돌면서 3개월사이에 1천3백억원의 돈을
제2금융권에 추가로 갚았다는 최승진부회장은 말은 자금압박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성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마저 앗아간 것은 지난해 10월 발생한
비자금파문이었다.

우성건설은 지난해 5월 긴급자금 1천3백억원을 제일은행을 비롯한 은행단
으로부터 수혈받으면서 자구책으로 5천억원에 달하는 보유부동산의 매각을
추진했으나 비자금파문으로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다.

6백억원선에서 거래성사단계에 접어들었던 우성타이어등 굵직한 협상도
비자금파문으로 중단됐으며 나머지 의견이 오가던 다른 물건도 매각통로가
모두 끊겼다.

우성이 매각키로한 법인은 우성타이어 우성유통 리베라백화점등 우성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가 포함되고 22개의 크고 작은 토지및 건축물이 망라돼
있어나 지난해 거래가 성립된 것은 6건에 불과한 상태이다.

건설업계에서는 90년대초 우성건설의 극심한 내부갈등으로 기술자등
상당수의 임직원들이 빠져 나간 것도 경영난의 원인으로 꼽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