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R사장은 최근 A정당 Q의원의 방문을 받았다.

R사장은 선거철이 다가오니까 또 돈을 보태달리겠거니 하고 적절한
거절구실을 마련해놓았다.

그러나 Q의원의 방문용건은 엉뚱했다.

"돈 안쓰는 선거를 치른다고 하지만 선거조직을 가동하고, 명함과
인쇄물 돌리는데 엄청난 돈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나 "실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설명과 함께 "경기도소재 싯가 4억짜리땅을 법인명의로
20억원에 사줄 수 없겠느냐"고 완곡히 부탁하더라는 것.

이 그룹의 다른 최고경영자도 B정당의 서울지역 총선출마자로부터
"서울시내에 있는 2억짜리 단독주택을 6억원에 구입해달라"는 비슷한
요청을 받았다.

현대그룹의 H씨는 충남지역 공천이 확실한 C정당후보로부터 "지역주민
5백명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견학을 시켜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단순견학이면 몰라도 그는"그룹측이 식사와 다과 음료를 제공해주고
이왕이면 "선물"까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청탁반 압력반의 말을 들어야
했다.

대우그룹의 한 최고경영자는 부평지역에 출마하려하는 한 후보로부터
"후보자별 인기도순위조사" 요청을 받고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 후보는 대우자동차의 주력공장이 부평에 있는 만큼 이 회사 임직원의
후보자에 대한 평가를 금배지획득의 중요한 변수로 보고 이를 이용하려
했던 것.

비단 이들 그룹만이 아니다.

주요그룹을 비롯 대기업들이 총선이 임박해지면서"금배지"를 노리는
다양한 선량후보들로부터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지원요청을 받는 사례가
많아면서 무척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기업들은"총선후보자들이 과거처럼 돈을 노골적으로 달라는 요청은
줄었어도, 교묘한 방법으로 지원사격 요청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

총선을 향해뛰는 후보자들이 기업들에 요구하는 것을 유형별로 보면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부동산의 고가매입 <>주력사업장의 여론조사 <>지역주민
공장견학 협찬외에도 <>지구당 사무실용 컴퓨터및 텔레비젼, 핸드폰 등
통신장비에 대한 무상지원요구 등도 있다.

"과거에는 자금조달 파이프라인이 취약했던 야당후보자들이 은밀한
부탁을 많이 했으나 이번 총선에선 여당후보들의 "SOS"타전이 늘고
있다(S그룹 X전무)는 점도 새로운 양상이다.

물론 세상 변할줄 모르고 아직도 현금뭉치를 달라고 당당하게 요청하는
"간큰후보자", 선거자금모금행사에 대한 기금출연과 개인후원회 가입,
개인연구소운영에 필요한 기금의 조건없는 출연등을 요구하는"철판형"도
여전히 상당수 있다고 기업관계자들은 비판한다.

또 총수와 잘아는 후보의 경우 계열사직원을 무보수 선거요원으로
활용하기위해 보내달라고 하는"몰염치형"도 있다.

재계는 이같은 총선후보자들의 손벌리기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서 대부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비자금사건으로 전직대통령이 구속되고, 총수들이 검찰과 법정을
들락날락하는 "역사 및 경제 바로세우기" 태풍속에서아직도 일부 정치인들이
구시대적인 관행을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반응이다.

전경련관계자도 "재계가 비자금사건이후 자정선언을 통해 음성적인
정치자금제공을 중단하고, 정경유착근절을 위한 투명경영에 주력하고
있다"며"그러나 일부정치인들은 아직도 기업에 손벌리기를 거두어들이지
않고있다"고 비판했다.

H그룹관계자는"정치인의 이같은 행태가 지속되는한 기업들의 자정노력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며 경고한 것은 기업인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이의춘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1월 1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