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첩에는 잃어버린 역사가 들어있다.

옛 앨범속에 갇힌 기억들을 불러내 하나하나 이름붙여주는 일은 단절된
역사의 복원작업이기도 하다.

최근 출간된 사진에세이집 "잃어버린 앨범"(까치간)에는 한국근대사의
이면이 응축돼 있다.

저자는 미술평론가이자 사진작가인 정진국씨(40).

이 책에는 그가 8년동안 수집한 사진과 거기에 얽힌 사연들이 담겨있다.

1910년대의 젊은 아낙과 50년대의 여학교 동창, 70년대의 동두천
아저씨까지 고단한 시대를 지나온 이웃들의 표정이 들어있다.

여기에 실린 사진들은 지난달 프랑스 한국문학포럼에서 사진전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첫장을 넘기면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아기의 돌사진이 나온다.

그의 손에는 꼬깃꼬깃한 지폐가 쥐어져 있다.

저자는 이 사진을 보고 실타래나 연필 공책 대신 돈을 집어드는 순간
어른들이 질렀을 환호성을 연상한다.

"그래 잘 골랐다.

뭐니 뭐니 해도 돈이 최고 아닌감.

고놈 참 영악스럽기도 하지".

금숟가락을 물고 태어나기는 커녕 나무주걱 빨기도 벅찼던 시절, 배나
곯지 않았으면 하는 이웃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유독 병원주변에 많이 몰려 있던 사진관이며 독사진 한 장 찍기위해
온갖 치장에 정성을 쏟는 시골사람의 표정, 졸업앨범속에서 잔뜩 폼을
잡고 웃고 있는 까까머리 학생들도 눈길을 끈다.

1920년 함북 청진에서 찍은 결혼식 사진에는 만국기가 보인다.

맨 왼쪽에 걸린 일장기가 유난히 선명하다.

연미복에 드레스차림의 신랑신부를 앞에 세우고 뒤에는 한복 두루마기로
정장한 주례가 섰다.

카네이션이 등장하고 풀잎화관이 파마머리를 뒤숭숭하게 부풀릴
때에도 바닥에 깔린 화문석의 격자무늬만큼은 우리의 국적을 말없이
보여준다.

해방후 결혼식장 연단마다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는 태극기도 우리
근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다.

50년대 이후에는 흑백사진에 색깔을 입힌 채색사진들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런가 하면 모사용 초상사진을 맡기는 사람들의 별난 주문도 유행어처럼
번졌다.

"더 젊어 보이게 해 주이소".

사진사 아저씨는 얼굴의 잡티나 검버섯을 지우고 눈썹을 그려넣은 뒤
입술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새빨갛게 칠했다.

배지나 모표 단추에도 금분을 입혀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꿈을 찍는 사진사"였다.

저자는 후기에서 "사진첩은 세월을 모셔둔 사당같은 것"이라며 "평범한
앨범사진이지만 그속에는 삶과 역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 고두현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