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은행은 옛날 한국의 며느리시집살이 원칙을 철저히 지켜 왔기 때문
이다.
예치금의 주인이나 조성방법등에 대해 "보지도 듣지도 묻지도" 않아 검은
돈의 은신처로 적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은행의 명성(?)은 이제 서서히 퇴색돼 가고 있다.
한예로 필리핀의 고마르코스대통령이 재임시절 스위스은행에 예치했던
막대한 부정축재자금은 필리핀정부에 환수당했다.
카를로스 살리나스 전멕시코대통령의 처제도 살리나스가문이 은밀히 예치한
것으로 알려진 8천4백만달러를 인출하려다 제네바에서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한국의 노태우 전대통령의 부정축재자금 예치구좌에 대한 양국 공조수사도
급진전되는등 검은 돈의 주인공들은 더이상 스위스은행에 기댈수 없는
형편에 처한 것이다.
이에따라 검은 돈을 세탁하기 위한 편법이 새로이 동원되고 있다.
가장 고전적인 수법은 검은 돈을 조성한 현지에서 주류 전자제품 골동품등
값비싼 상품을 구입, 자신의 나라나 제3국에서 덤핑판매하는 방법이다.
원래 조성한 금액보다 20%-30%정도 밑지는 장사지만 자금조성경위가 여간
해서는 들통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검은 돈의 주인공들이 믿고 시도하는
방식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은 이러한 돈세탁 길을 차단, 마약 뇌물등 검은
거래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클린턴 미행정부는 돈세탁이 횡행하는 나라의 금융기관이 미국내 금융기관
에 전산접속할수 없도록 조치를 취할 것이란 위협도 하고 있다.
돈세탁행위는 그러나 뿌리채 뽑아버릴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케이먼군도나 인도양의 세이셸공화국등 돈세탁과정에서 떨어진 돈으로
경제를 지탱해 나가는 나라들이 아직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기법이 발달해 익명으로 자유로이 쓸수 있는 전자머니
(사이버캐시)가 거래수단으로 정착될 경우 검은 돈의 출처를 캐내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앨빈 토플러가 말했듯이 0과 1이란 숫자로 상징화된 미래의 전자머니는
실소유주나 출처에 대한 꼬리표 없이 전화선이나 컴퓨터망을 통해 몇번이고
순식간에 이동, 오히려 검은 거래를 조장할수도 있다.
< 김재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