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가 "비자금 태풍"에서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그룹총수들에 대한 소환조사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조사결과도 일부기업에
대한 불구속기소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재계일각에선 특히
비자금 파문을 다소 다른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다.

총수가 검찰에 불려가는 "씻기 힘든"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이를 전화위복
의 계기로 삼아 경영개혁을 가속화하자는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

"곪은 부위"를 잘라내는 아픔을 딛는다면 명실상부한 "투명 경영"이 정착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젠 정치권에 "상납"을 안해도 경영상 불이익이 없게된 것도 재계로선
다행이다(D그룹 L상무).

"이왕 사과할 것이라면 사족을 달지 말자. 재계도 분명히 잘못한게 있지
않느냐"(3일 경제계 중진회의에서 L그룹 K회장발언)는 자성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삼성그룹 비서실의 배동만 전무는 "비자금 파문으로 잃은 것도 많지만
재계 전체적으론 얻은 것도 많다"며 "이번 사건을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기회로 활용한다면 재계로선 전화위복인 셈"이라고 평가했다.

검은 거래를 통해 기업을 살찌우는 과거의 행태를 일소하는 계기가 될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일부기업에선 이같은 움직임이 현실화되고 있다.

"부드러운 기업"(현대) "좋은 기업"(삼성) "강한 기업"(LG)을 표방하던
대기업들은 이제 "깨끗한 기업"을 새로운 모토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정도 경영"이라는 용어가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미지 쇄신을 위한 이윤의 사회환원 사업이나 자원봉사활동도 활기를
띨것으로 보인다.

경영혁신의 바람은 기업의 인사체제에도 한바탕 새물결을 예고하고 있다.

경영예측능력과 정보네트워크에 밝은 인사들이 발탁되는 것은 피할수 없는
대세가 될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관리나 경리담당 임원의 역할이 축소되는 대신 영업이나
정보담당 임원의 승진이 예상된다"(H그룹 기획조정실 이사)는 분석이다.

"로비의 시대"에서 "정보의 시대"로 권력이동이 더 급격히 이루어지고
그에 대응한 인력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재계의 계열사 통폐합및 구조조정작업도 빨라질 전망이다.

비자금파문의 한가운데에 있는 한보그룹의 계열사 축소와 통폐합조치는
재계의 이같은 기류를 반영하는 것.

재경원과 공정거래위원회도 비자금파문을 계기로 대기업들의 불공정
하도급거래 준수여부에 대한 조사를 강화한다는 방침이어서 이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 틀림없다.

"재계에 또 한차례 사업구조 조정 바람이 불고 기존계열사 통폐합 스케쥴도
앞당겨질 것"(D그룹 경영기획실 상무)이라는 전망이다.

비자금 파문으로 재계는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라는 "아픈 상처"를 감수
해야만 했다.

당시의 상황이 강요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책임의 일단을 면할 수는 없다.

이제 공은 다시 재계로 넘어 왔다.

"검찰의 총수에 대한 소환수사는 단순한 "면죄부"가 아니라 어두웠던
과거를 마감하는 "새출발"의 계기로 작용해야 한다"(H그룹 K전무)는 것이다.

"비자금 파문은 분명 재계로선 가슴아픈 일이다. 그러나 이제 파문에 갇혀
허우적댈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이 남긴 교훈을 곰곰 생각해야 할때"(황정현
전경련부회장)라는 얘기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