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수탈이 최고조에 달하던 지난 1931년 전국민의 27%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생계조차 어려운 극빈민이나 걸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 1940년대 초반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약 45세로 현재보다 26세가량
적었고 12세 이상 사람의 80%가 문맹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통계청이 21일 발표한 "광복이전의 경제.사회상"에 따르면 1943년 한국내
공장수는 1만3천여개로 36만3천여명이 종사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하루에
평균 11시간 일해 쌀 1.2섬값의 월급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말단공무원의 월급은 쌀 1섬 보리쌀 2.5섬 값인 46원이었고 목수의 하루
일당은 쇠고기 2.8근값인 1.97원이었다.

또 직장을 갖고 있다가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수가 1933년의 경우 전체
인구의 10.3%에 달했다.

일제 강점이후 만주등지로 떠난 사람이 1백만명을 넘는것으로 추산됐고
빚이나 생활고에 쪼들려 산으로 들어간 화전민도 1백52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930~40년대 개인간 돈거래에서 이자는 월간 1.5~3.9%수준이었고 시장상인
이 대금업자에게 돈을 꾸는 경우 월간 최저 2.7%에서 최고 10.9%까지의
이자를 물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1943년 인구 1인당 은행예금은 95.7원이었고 1938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1백30원으로 쌀 3.9섬에 해당했다.

일본 통치말기인 1943년 의사수는 3천8백13명으로 인구 7천명당 1명에
불과했고 이같은 열악한 의료환경으로 10세미만 영유아중 23%가량이 전염병
으로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1924년 17세 남학생의 평균신장은 1백54.5cm, 평균체중은 43.9kg으로
93년에 비해 키는 평균 16.4cm, 몸무게는 평균 18.7kg 각각 적었다.

이밖에 44년 당시 12세이상의 한국인중 약80%가 문맹이었으며 전문학교이상
의 고등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5천6백82명당 1명꼴(40년)이었다.

25년기준으로 중등학교이하의 학생중 64%가 기생충에 감염돼 있었다.

일제강점기간에 동양척식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30년간 9.4배 늘었으며
42년기준으로 전체농가의 70%이상이 사실상 소작농가이하의 계층이었다.

35년당시 15~19세 여자중 63%가 결혼했으며 10~14세여성도 기혼자가 4%나
돼 암울했던 시대상을 반영, 조혼풍습이 성행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 김선태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