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가 급락세로 돌아선 지난 8월중순.

일본의 대표적인 반도체 업체 후지쓰의 T이사실에는 아침부터 은행
관계자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엔화약세로 영업환경이 호전됐으니 새로운 투자계획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발빠른 계산에서였다.

T이사는 "아직은 사태진전을 관망하는 상태"라면서도 엔화약세가 일본
반도체업계의 활황에 기름을 붓게 되리라는 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수퍼엔고 시절에도 일본반도체 업체들은 생산량이 주문을 따라가지
못하는 초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도시바에는 올 여름들어 미IBM, 컴팩등 주요PC업체 10여개사의 간부들이
메모리의 품귀현상을 우려, 계약을 장기화하기 위해 본사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같은 수요강세로 94회계연도(4월~95년3월)동안 일본 주요 반도체업체들은
높은 매출실적을 올렸다.

후지쓰와 도시바는 매출이 각각 14%씩 증가했다.

일본 최대의 반도체업체인 NEC도 이기간동안 반도체매출이 전년대비 15%
증가, 9천3백억엔(1백2억달러)을 기록했으며 올회계연도에는 13% 증가,
1조5백억엔에 이를 전망이다.

가전부문에서 지난 회계연도(3백억엔적자)까지 3년연속 적자를 본 히타치는
반도체사업부문의 효자노릇으로 올해 매출이 60~70% 향상(UBS증권사)됐다.

최근에는 "엔화약세"라는 새로운 요인까지 겹쳐 일본반도체업계는 그야말로
"즐거운 오산"을 바로잡느라 주판알 퉁기기에 여념이 없다.

모건스탠리증권은 엔화환율이 달러당 85엔에서 90엔으로 높아질 경우 일본
전자32사의 경상이익 증가율은 당초 예상(8%증가)을 훨씬 웃도는 16~18%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증가요인의 절반은 반도체시장의 호조, 절반은 엔화약세의 영향이라는 것이
모건스탠리의 설명이다.

물론 일본 반도체업계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지난 93년 미국에게 내준 반도체 챔피온 타이틀을 아직까지 탈환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미국의 세계 반도체시장 점유율은 33%로 일본(29%)보다 4%포인트
앞서 있다.

일본의 D램아성에 도전하고 있는 한국도 만만찮은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올해 한국업체들의 반도체투자증가율은 70%(살로몬브라더스)로 일본업계를
뛰어넘을 전망이다.

한국업체들에게 추월당하지 않겠다는 긴장감이 일본업체들의 설비투자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대한 일본반도체업계의 전략은 "생산시설의 글로벌화"로 집약된다.

올해 일본 5대 반도체업체들의 총 자본투자계획은 지난해(5천2백90억엔)
보다 24% 늘어난 6천5백50억엔으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가운데서도 업계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단연 도시바의 미국진출소식
이다.

반도체생산의 국수주의자로까지 불리며 일본 국내생산을 고집했던 도시바도
미국고객을 붙잡기 위해 "시장밀착형"전략으로 돌아선 것이다.

도시바는 올해 총투자의 3분의1을 해외에 투입해가며 "국제화기업"으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일본업계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일본 최대의 반도체업체 NEC는 투자액수를 전년보다 20% 높여 1천5백억엔
으로 잡아놓고 있다.

역시 이가운데 3분의1가까운 4백10억엔이 "외국행"이다.

일본업체들의 투자계획은 64메가D램생산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도시바와 IBM이 미국에서 벌이기로 한 합작사업도 64메가D램 생산이다.

NEC가 최근 일본과 영국, 미국등 3곳에 짓겠다고 발표한 새 생산시설도
모두 64메가D램용이었다.

후지쓰 역시 오레곤주에 64메가D램 공장건설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64메가D램은 오는 97년이후에야 수요가 "생기기" 시작할 전망이다.

시장수요가 16메가D램으로도 옮겨가지 못한 시점에서 한단계 뛰어넘는
투자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일본업계.

"차세대 반도체시장 쟁탈전에서는 반드시 완승하겠다"는 속셈이다.

< 노혜령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9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