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수주액 318억달러에 매출액 297억달러.

140여국에 거미줄처럼 설치된 자회사 1,400여개.

종업원수 21만명.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독일 지멘스와 함께 세계 3대 중전기업체로
꼽히는 스위스 ABB의 외형을 나타내는 지표다.

이런 엄청난 외형으로 미뤄보면 본사의 건물도 대단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ABB본사는 기대밖이다.

웬만한 중소기업만도 못하다.

공장옆에 딸린 조그만 6층짜리 부속건물이 전부다.

이곳에서 일하는 본사직원도 겨우 171명에 불과하다.

연간매출액이 300억달러에 달하지만 본사직원은 고작 171명인 회사.

여기에 ABB가 추구하는 세계화전략이 그대로 담겨있다.

"우리회사의 경영구조는 3개의 모순된 요소로 구성돼 있다.

크고도 작은 기업, 글로벌하지만 로컬한 기업, 중앙집권적이면서도 분권적
인 체제가 그것이다"(바르네비크회장)

ABB는 실제 바르네비크회장의 말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다.

방대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과 같은 유연성을 발휘한다.

140여국에 진출해있는 자회사들의 신속성은 현지기업을 무색케한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거대 대기업들이 관료조직화등으로 "대기업병"을 앓고
있는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래서 ABB는 "21세기 글로벌 기업의 모범형"으로 불린다.

ABB의 이런 모습은 특유의 "조직론"에서 기인한다.

ABB는 지난 87년 스웨덴의 아세아그룹과 스위스의 브라운보베리그룹의 합병
으로 생겨났다.

이때부터 그룹총수직을 맡고 있는 바르네비크회장은 "경영조직은 얇을수록
좋다"는 신념을 실행에 옮겼다.

취임하자마자 2,000여명의 본사직원을 10분의1로 줄였다.

독일사업본부인 만하임에선 본부직원 1,600여명을 100여명으로 감축했다.

미국에서 컴버스천엔지니어링사를 인수하자마자 가장 먼저 단행한 작업도
600여 본사직원을 100여명으로 줄이는 일이었다.

바르네비크회장은 본사조직을 슬림화하는 대신 철저히 분권화.현지화
조직을 건설했다.

"메트릭스조직"을 도입, 모든 조직을 50명정도의 소규모사업집단으로
나누는데 성공했다.

ABB특유의 메트릭스조직의 원리는 간단하다.

그룹이사회밑에 상호 독립적인 사업영역과 지역영역이라는 두개의 조직을
둬 경쟁및 협조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한축을 이루는 사업영역은 45개로 구성된다.

지역에 관계없이 발전 송.배전 플랜트등 종류에 따라 사업을 총괄하는게
사업영역의 일이다.

사업영역의 모세혈관이 세계 각지에 산재해있는 5,000여개의 이윤센터
(Profit Center)다.

이윤센터는 각각 50명안팎으로 구성된 최소 사업단위로 완전한 분권화
경영체제를 갖추고 있다.

각 이윤센터는 자체적으로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작성한다.

개인의 인사고과도 자신이 속해있는 이윤센터의 성과에 의해 좌우된다.

사업영역의 반대편 축에는 50여개의 지역영역이 존재한다.

유럽 북미 아.태등 3개의 광역지역분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세계를
50개지역으로 세분화, 그 지역에서 벌이는 사업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는
조직이다.

3명의 광역지역본부장밑에는 각각의 국가 혹은 권역별로 50여명의 지역
관리자가 있다.

이들은 1,400여개의 자회사를 총괄한다.

지역관리자가 소속되어 있는 ABB회사는 보통 지주회사의 형태로 설립돼
해당국가에 진출해있는 ABB자회사를 관리한다.

이렇듯 메트릭스조직은 말그대로 X축의 사업영역과 Y축의 지역영역을 상호
독립적으로 동등하게 존재시키는게 특징이다.

4명의 사업영역 대표와 3명의 지역영역 대표는 바르네비크회장과 함께
그룹이사회를 구성한다.

일반적으로 사업부서를 토대로 그 밑에 지역담당부서를 두는 글로벌 기업
들의 경영패턴과는 대비된다.

"ABB내에서 사업부문의 매니저와 지역부문의 매니저는 서열상 동일하다.

오히려 최근 들어선 사업확장을 위해서 지역부문이 보다 중시되는 편이다"
(마이클 로버트슨 홍보담당이사)

어떻게보면 메트릭스조직은 상호 경쟁만 유발시켜 효율성을 저하시킬
것처럼 보인다.

실제 그런면이 없는건 아니다.

사업담당자는 규모의 경제를 추구한다.

때로는 해당지역의 이익을 희생시켜서라도 전사적인 차원에서 해당 사업의
이익극대화에 주력하기도 한다.

반면 지역담당자는 사업보다는 지역우선이다.

그래서 사업담당자와 지역담당자간에 마찰이 빚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런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다는게 업계의 평가다.

사업영역의 "규모의 경제"와 지역영역의 "분권화 효율성"이 교묘하게
결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핀란드 ABB모터스의 경우 생산활동이나 조직관리는 현지의 소조직
이 담당하지만 수주.판매활동은 본사를 통해 세계 100여개국에 구축된 판매망
을 활용한다.

한정된 인원으로는 도저히 수집할수 없는 세계 각국의 연구개발정보나
정부발주공사에대한 정보도 본사의 정보망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대형프로젝트의 경우 ABB그룹내의 컨소시엄이 형성되는 것도 다반사다.

필리핀의 복합사이클발전소를 건설하는데 4개국의 ABB회사들이 힘을
합쳤다.

중국에 진출할때는 홍콩 대만 싱가포르등 중국에 가까운 자회사들이 연합
했다.

지역사업의 경우 자회사의 유연성이 돋보인다.

전자부품사업은 전자왕국 일본에서도 애프터서비스만큼은 최고로 평가된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인 미국의 톰 피터스는 유명한 저서 "해방경영"에서
바르네비크회장을 "20년대 근대적 대기업조직의 모델을 구축한 GM의 알프레드
스론이후 현대적 조직구축의 대가"라로 평가했다.

ABB의 조직이 앞으로 세계화기업들이 추구해야할 조직모델임을 인정한
것이다.

이렇듯 조직의 선진성이 인정받고 또 효율성을 발휘하고 있는걸 보면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ABB의 세계화전략도 이미 절반의 성공를 거두고 있는듯
하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7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