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일본의 쌀협상이 예정보다 다소 길어지긴 했지만 비교적 순조롭게
합의에 도달한 것은 북한의 식량사정이 그만큼 심각함을 입증한다.

1백만t을 희망하던 북한이 30만t선에서 일단 만족한 것은 협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합의를 통해 북한과 일본은 서로간에 많은 것을 얻은 것으로 평가
된다.

북한은 한국에 이어 일본으로부터도 쌀을 얻어냄으로써 식량난을 완화시킬
수있게 됐다.

"주린 배" 때문에 민심이 동요하는 불안을 당분간 억제할 수있게 된
것이다.

조만간 실시될 것으로 예상되는 김정일의 주석취임식및 해방50주년행사등
에서 기념쌀을 특별배급할수 있는 여유까지 확보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본으로서는 생색도 내고 실속도 챙기는 효과를 얻었다.

일본은 우선 굶주리는 국민들에게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인도적 차원에서
세계로부터 많은 점수를 얻었다.

경제적으로도 전혀 밑진 것이 없다.

일본이 북한에 유상지원하는 쌀은 금리는 없지만 t당 2만엔의 대금을
받는다.

재고쌀을 국내에서 매각했을 경우에 비해 두배수준에 이르는 가격이다.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은 더 많다는 이야기다.

양측이 얻은 가장 큰 효과는 역시 핵개발의혹등으로 막혀있던 국교교섭을
재개할 명분을 얻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는 경제난탈출및 고립회피를 위한 목적등으로 국교교섭재개의사
를 이미 통보해놓은 상태이고 일본도 전후처리와 관련한 큰 문제를 해결
한다는 차원에서 국교교섭재개를 적극 희망해 왔다.

이날의 합의가 일본연립여당의 적극적인 중재에 따라 이뤄졌다는 사실도
일본의 국교정상화의지가 얼마나 강력한 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정부및 연립여당은 이미 국교교섭을 위해 본격적인 준비작업에 착수
했다.

일본정부는 우선 대일정책책임자인 김용순조선노동당비서를 곧 일본으로
초청키로 했다.

또 조만간 방한단을 파견 그동안의 협상경위및 국교교섭과 관련한 입장을
한국측에 설명할 계획이다.

이같은 점들을 감안하면 양측의 자세가 종전보다 훨씬 우호적으로 바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양측간에는 아직도 많은 현안들이 쌓여있어 국교교섭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지 여부는 속단을 불허한다.

우선 북한과 미국을 중심으로 협상이 진행중인 핵개발의혹문제가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미.북한간합의의 성실한 이행등을 촉구하고 있지만 북한은 핵문제는
어디까지나 미국과의 협상이지 일본은 관계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보상문제에서도 큰 의견의 차이가 있다.

북한은 전승국이 패전국에 요구하는 배상의 개념을 주장하는데 반해 일본은
일반적손실에 대한 청구권문제의 차원에서 대화에 임한다는 입장이다.

지난90년 9월 조선노동당과 일본의 자민당 사회당사이에 발표된 3당공동
선언에 포함됐던 전후보상문제에서도 큰 거리가 있다.

올 3월 연립여당과 조선노동당의 4당합의는 3당공동선언을 역사적인
것이라고 애매하게 평가했지만 북한은 아직도 전후보상을 주장하고 있고
일본은 이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일본으로서는 대한항공기폭파범인 김현희씨에 대한 일본인교육담당자로
알려지고 있는 이은혜씨문제도 거론할 방침이지만 북한은 이문제는 한국측
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은 이번의 쌀지원으로 국교교섭에서 종전보다 다소 편한 입장에 서게
됐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문제에 관해서도 북한은 쌀지원은 어디까지나 인도적차원의 문제
에 불과하다고 강조할 것이 틀림없다.

비록 쌀을 얻어 허기를 채워야 하는 처지에 있긴 하지만 명분상으로는 절대
밀리지 않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 도쿄=이봉구특파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