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정부가 인구억제에 고민하고 있다"

80년대초 삼성물산의 해외영업담당 K대리는 이런 외신기사를 읽고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는 즉각 인도 지사에 텔렉스를 쳤다.

"인구억제에 관한 획기적 아이디어가 있으니 인도 보건부장관과의 면담을
무조건 주선해달라"는 내용으로.

이틀만에 인도지사로 부터 회신이 왔다.

"시간을 잡아놨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인도에 도착한 그는 보건부장관을 만나고는 다짜고짜 콘돔을
내밀었다.

그가 말한 "획기적 아이디어"란 다름아닌 콘돔이었던 것.

공교롭게도 인도 보건부장관은 여성이었다.

한동안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여성장관 입에선 이윽고 한마디 말이
떨어졌다.

"오케이"라는.

한줄의 외신이 K대리에겐 "한 건"을 안겨준 단초가 된 셈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종합상사들의 비즈니스는 이랬다.

순발력과 배짱, 오기로 밀어붙여가며 수출프론티어를 하나 둘씩 개척해
나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종합상사들이 취급하는 품목이 눈덩이처럼 불어난건
물론이다.

"바늘에서 대포까지" "이쑤시개에서 인공위성까지".

종합상사들이 다루고있는 품목의 방대함을 함축하는 말들이다.

"장사꾼 경력" 20년이 넘는 진형옥(주)선경 건자재사업부장이 말하는
잡화상론이 재미있다.

"눈덩이는 굴리면 굴릴 수록 하염없이 불어난다.

마찬가지로 상사맨들이 수출입업무를 하다보면 취급하게 되는 품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종합상사들이 아무 물건이나 무턱대고 취급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름의 원칙과 기준, 시쳇말로 "계산"이 맞아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적정 마진이 보장돼야 한다.

설령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으로 시장이 커질 것이란 전망정도는
나와야 된다.

이같은 기준에 맞춰 종합상사들이 취급하고 있는 품목을 정확히 집계하기
는 불가능하다.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신제품들이 제깍제깍 종합상사들의 "품목리스트"
에 쉴새없이 반영되고 있어서다.

첨단기술이 빚어내는 각종 신제품들이 종합상사들의 비즈니스에 즉각
영향을 미치는, 이를테면 "테크노 비즈니스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신기술 신상품트렌드는 종합상사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 나오는 신품목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프로 장사꾼"을 확보하는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다.

단적으로 갓 개발된 전자제품의 성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상사맨들이 수두룩하다(H사 L이사)는 것.

종합상사 사장들은 회의때마다 임직원들에게 "세일즈 엔지니어가 되라"고
다그치고 있다.

요즘 상사들의 고민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건 분명 "테크노 비즈니스시대"를 맞아 부닥치고 있는 한국 종합상사들
의 한계랄수 있다.

"종합화"에 덧붙여 "전문화"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얘기다.

상사들은 그 해결책으로 "소사장제도"에 부쩍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각 품목별로 책임자들을 지정해 영업은 물론 관리 인사까지 전결처리토록
하는게 소사장제도다.

상품변화에 대한 적응을 빠르게 하고 업무처리의 순발력을 높이자는게
포인트다.

올초 (주)대우가 사내에 3백30명의 소사장을 두겠다고해 업계의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취급품목 담당자별로 사장에 준하는 독자성을 인정하겠다는게 이 회사가
소사장제를 취한 목적이다.

삼성물산도 소사장제도를 확산시키는데 적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이 회사의 신세길사장은 "중후장대에서 경박단소로의 산업구조 전환이
가속화되는데 따라 종합상사들도 "다품종소량"이란 바이어들의 상품수요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일이 급선무가 됐다"고 말한다.

다른 종합상사들에 비해 그룹계열사의 "지원"이 취약한 효성물산은
전문화를 통한 "홀로서기"에 승부를 걸고 있다.

원무현효성사장은 "첨단제품을 만들어내는 벤처형 중소기업들을 발굴해
수출로 연결시킨다는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이를 위해 회사조직
내에 벤처형 사업팀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젠 상사맨들이 여성장관에게 "콘돔"을 내미는 순발력과 돌파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전문화시대의 한 복판에 들어서있다는 얘기다.

< 김영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