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베 교외 15km 지점에서 다리가 끊겨 더이상 차를 타고 갈 수가 없어
시커먼 연기로 뒤덮인 하늘 아래를 걷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걷는 동안 갈라진 도로와 무너진 지붕,그리고 붕괴된 담벼락
등이 군데 군데 보였다.

그런데 그 어수선한 틈에 쓰레기통과 박스등에는 깨진 접시와 유리등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벌써 청소를 시작한 것이다.

고베에서 10km 떨어진 니시노미야시에는 지어진지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기와지붕의 목조 건물이 완전히 파괴돼 있었다.

고베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진 오사카에서 고베로 향하는 모든 도로는
밀려드는 차량으로 꼼짝하기 어려웠다.

지진 피해 지역 친지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고베로향하는 차량들이
쇄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틈에 앰불런스와 소방차들도 거리에 갇혀사고 현장으로 가는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시내의 주인 없는 빌딩들에서는 지진의 충격으로 경보장치가 요란하게
울려대고있었으나 약탈의 모습은 어느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야스이 쇼지씨(63세)는 완전히 파괴된 자신의 70년된 2층가옥 앞에서
가족들과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이같이 끔찍한 일을 당하기는 처음"이라며 고베시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모두들 무표정한 얼굴로 추위를 막기 위해 모포를 뒤집어 쓴채 아무런
말이 없다.

두개의 블록을 지나자 블록 전체가 완전히 파괴된 지역이 나타났다.

목조가옥한채만이 붕괴 직전의 기둥에 의지해 서 있을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먼지와 연기뿐이었다.

조금더 걸어내려가 보니 한 술집에는 수천개의 술병이 바닥에 깨져
나뒹굴고 있고 경보 장치만 혼자 울어대고 있다.

고베 교외 지역의 새 건물들도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다.

8층짜리의 은행 건물은 길가로 비스듬히 누웠고 다른 5층 신축 건물도
폭삭 주저 앉았다.

지진이 발생한지 24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내 곳곳에서는 검은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유출된 가스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소방차들이 주위에 보이고는 있지만 수도가 끊긴 탓에 소방수들은 그저
불을 멀거니 바라만 볼뿐 아무런 대책이 없어보인다.

경찰과 민방위 당국은 사람들을 위험지역에서 대피시키고 임시 구호소로
식량과 모포등을 실어 나르고 있다.

구조대원들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매몰 지역을 물어보며 수색 작업을
펴고 있으나 어두워지면서 작업이 어려워져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운좋게 택시를 잡아타고 고베 서부의 시립 병원으로 가 보았다.

병원 안은 많은 환자가 밀려들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적막감이 감돌았다.

택시 기사인 스미노 리키히로씨는 가구가 쓰러질때 이불을 덮고 있어서
위험을면했다고 말하고 택시를 몰고 오는 동안 쓰러진 건물 잔해 사이를
헤치고 오느라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는 "동경이라면 몰라도 고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전문가들이 우리의 도로와 건물은 미국과는
달리 안전하다고 했으나 그것이 거짓임이 드러났다"고 푸념했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