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말 김대통령 지시로 30년규제 마감 예고..우리의 뒷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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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23일.
홍재형 재무부장관(현 경제기획원장관)은 김창록 외환정책과장을 장관실로
은밀히 불렀다.
김영삼 대통령이 APEC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지 보름정도 지난뒤였다.
지시사항은 "외국환관리법을 언제쯤 폐지할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하라"는
것.
김과장은 4일후 "경상거래는 조속히 자유화할수 있으나 자본거래는 좀
시일이 걸려 5년안에는 폐지할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고
홍장관은 지난1월3일 신년기자간담회 형식을 빌러 "외국환관리법을 5년내
폐지하는 각오로 외환제도를 개혁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30여년간 "철통규제"로 꽁꽁 묶여있던 외환제도개혁의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이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수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재무관료들이 외국환관리법을 폐지할리
만무하다"는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재무관료들조차도 "뭔가 모르고 하는 얘기"정도로 가볍게 넘겼다.
이같은 냉소적인 반응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럴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지난2월과 6월 두차례에 걸쳐 <>현지금융한도폐지 <>개인의 외환보유자유화
등 굵직굵직한 과제들이 당초일정보다 앞당겨 시행, 외환제도개혁의 서막이
열리면서부터다.
드라마의 1막은 지난2월 금융산업발전심의회 산하에 외환제도개혁소위원회
(위원장 박영철 금융원구원장)이 구성되면서 소위안이 금발심공청회에
상정된 지난9월8일까지.
주인공은 김과장과 민상기서울대경영학과교수및 정기영금융연구원선임연구
위원.
무대는 서초동 모음식점.
외환정책과과 소위는 여기에서 거의 매주 저녁식사를 겸한 토론회(21차례)
와 실무자회의(12차례)를 열면서 개혁방안의 대본을 짰다.
7개월여만에 선보인게 지난9월8일 소위의 공청회안.
"생각보다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막은 배우와 무대, 각본이 상당히 바뀌어 진행됐다.
김과장은 "여전히" 주인공역을 맡았으나 감독은 박재윤장관으로, 조연출은
정덕구국장으로 바톤이 넘어갔다.
무대도 외환정책과를 중심으로 한 과천종합청사로, 각본은 소위안의
구체화로 명확해졌다.
그러나 2막진행은 쉽지 않았다.
가장 컸던 것이 개혁작업을 진두지휘할 조연출이 자주 바꿨던 것.
개혁작업에 시동을 건 사람은 조건호국장(현감사관)이었으나 4-6개월을
텀으로 이정보국장(현 세무대학장) 윤진식국장(현 대통령경제비서관)을 거쳐
정덕구국장으로 지휘권이 이양됐다.
그와중에 감독도 홍부총리에서 박장관을 바뀌어 다소 굴곡을 겪기도 했다.
이같은 불안정한 상황하에서도 김과장이 초지일관 개혁의 물줄기를 지켜
나갔고 막판에 가세한 정국장의 강한 추진력으로 정부안을 성안, 5일
금발심에 상정함으로써 차질없이 막을 내릴수 있게 됐다.
정국장 취임후엔 수많은 에피소드를 기록했다.
부임후 첫 토요일이었던 지난달 5일.
정국장을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국 사무관이상 직원은 오전8시30분부터
오후10시까지 하루종일 토론에 열중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2시간을 쉰 것을 빼고는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지
않을 정도로 열띤 분위기였다.
또 근 한달동안 매일 밤12시까지 사무실불을 밝힐 정도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이같은 협조적 참여가 뒷받침돼 정부안을 마련했고 지난달24일 김대통령에
보고, "시드니선언"이후 첫 세계화추진계획으로 칭찬을 받았다.
지난1년여간 진행된 외환개혁드마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6일자).
홍재형 재무부장관(현 경제기획원장관)은 김창록 외환정책과장을 장관실로
은밀히 불렀다.
김영삼 대통령이 APEC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지 보름정도 지난뒤였다.
지시사항은 "외국환관리법을 언제쯤 폐지할수 있는지 검토해 보고하라"는
것.
김과장은 4일후 "경상거래는 조속히 자유화할수 있으나 자본거래는 좀
시일이 걸려 5년안에는 폐지할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올렸고
홍장관은 지난1월3일 신년기자간담회 형식을 빌러 "외국환관리법을 5년내
폐지하는 각오로 외환제도를 개혁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난30여년간 "철통규제"로 꽁꽁 묶여있던 외환제도개혁의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이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보수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해 할 재무관료들이 외국환관리법을 폐지할리
만무하다"는게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재무관료들조차도 "뭔가 모르고 하는 얘기"정도로 가볍게 넘겼다.
이같은 냉소적인 반응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럴수도 있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지난2월과 6월 두차례에 걸쳐 <>현지금융한도폐지 <>개인의 외환보유자유화
등 굵직굵직한 과제들이 당초일정보다 앞당겨 시행, 외환제도개혁의 서막이
열리면서부터다.
드라마의 1막은 지난2월 금융산업발전심의회 산하에 외환제도개혁소위원회
(위원장 박영철 금융원구원장)이 구성되면서 소위안이 금발심공청회에
상정된 지난9월8일까지.
주인공은 김과장과 민상기서울대경영학과교수및 정기영금융연구원선임연구
위원.
무대는 서초동 모음식점.
외환정책과과 소위는 여기에서 거의 매주 저녁식사를 겸한 토론회(21차례)
와 실무자회의(12차례)를 열면서 개혁방안의 대본을 짰다.
7개월여만에 선보인게 지난9월8일 소위의 공청회안.
"생각보다 개혁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2막은 배우와 무대, 각본이 상당히 바뀌어 진행됐다.
김과장은 "여전히" 주인공역을 맡았으나 감독은 박재윤장관으로, 조연출은
정덕구국장으로 바톤이 넘어갔다.
무대도 외환정책과를 중심으로 한 과천종합청사로, 각본은 소위안의
구체화로 명확해졌다.
그러나 2막진행은 쉽지 않았다.
가장 컸던 것이 개혁작업을 진두지휘할 조연출이 자주 바꿨던 것.
개혁작업에 시동을 건 사람은 조건호국장(현감사관)이었으나 4-6개월을
텀으로 이정보국장(현 세무대학장) 윤진식국장(현 대통령경제비서관)을 거쳐
정덕구국장으로 지휘권이 이양됐다.
그와중에 감독도 홍부총리에서 박장관을 바뀌어 다소 굴곡을 겪기도 했다.
이같은 불안정한 상황하에서도 김과장이 초지일관 개혁의 물줄기를 지켜
나갔고 막판에 가세한 정국장의 강한 추진력으로 정부안을 성안, 5일
금발심에 상정함으로써 차질없이 막을 내릴수 있게 됐다.
정국장 취임후엔 수많은 에피소드를 기록했다.
부임후 첫 토요일이었던 지난달 5일.
정국장을 중심으로 한 국제금융국 사무관이상 직원은 오전8시30분부터
오후10시까지 하루종일 토론에 열중했다.
중간에 점심을 먹기 위해 2시간을 쉰 것을 빼고는 화장실도 한번 다녀오지
않을 정도로 열띤 분위기였다.
또 근 한달동안 매일 밤12시까지 사무실불을 밝힐 정도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이같은 협조적 참여가 뒷받침돼 정부안을 마련했고 지난달24일 김대통령에
보고, "시드니선언"이후 첫 세계화추진계획으로 칭찬을 받았다.
지난1년여간 진행된 외환개혁드마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