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봉오리를 넘으면 두번째 산이 버티고 서있다. 기를 쓰고 세번째
봉오리까지 넘는다. 그래봐야 뭐하나. 이번에는 네번째 산이 앞을 가로
막는데..."

지난 2일 일본의 중앙부처가 모여있는 도쿄 가세미가세키의 총리관저.

무라야마 일본총리는 연금개혁법이 막 참의원(상원)에서 통과.확정된 직후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각종 개혁조치에 대한 관료들의 "비협조"가 생각이상이라는 하소연이었다.

연금개혁법의 골자는 사실 공무원에게는 좀 불리하게 돼 있다.

연금을 맨 처음 탈 수 있는 연령을 60세에서 65세 이후로 늦춘데다 요율은
대폭 인상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지금 노령화사회를 한참 치닫고 있는 중이다.

연금법도 이같은 시대흐름을 따른 것이다.

내용도 별로 대단한게 아니다.

"개정"정도의 표현으로 족할 법하다.

그러나 우리정부가 금융.외환제도를 고치면서 "개선안"이라는 말보다는
"개혁안"으로 쓰는 것처럼 일본도 이 정도의 내용을 "개혁"으로 표현한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그만큼 법령이나 제도 하나를 고치는데 걸리적 거리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그 대표적 걸림돌이 바로 관료집단이다.

무라야마총리가 편 "일산.사산론"의 산은 바로 관료집단을 뜻한다.

"규제완화와 제도의 투명성이 재임기간중 내건 캐치프레이즈였다. 그러나
나는 관료들에게 완패하고 말았다".

"개혁의 상징인물"로 신선감을 더했던 호소카와 전총리가 퇴임직후인 지난
4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토로한 얘기다.

"개혁"이란 이미지에 힘입어 역대 일본총리중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던
그에게도 관료집단의 존재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는 말이다.

일본에서 "관의 파워"를 실감케 하는 단적인 일화가 있다.

올 1월의 일이다.

일본정계의 막후실력자이자 개혁의 핵심참모였던 오자와의원이 사이토
대장성차관과 도쿄중심부의 고급요정 내실에서 만났다.

일본정부 최대의 난제인 경제활성화방안에 대한 대장성관료들의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소득세인하에 동의해 달라는 당부였다.

당시 일본경제신문의 표현을 빌리면 "대장성만 빼고는 거의 모든 국민들간
에 합의가 이뤄져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사이토차관은 오자와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소비세의 대폭 인상으로 세수결함이 보전돼야만 소득세인하에 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호소카와정권의 개혁과 경제활성화시책이 한꺼번에 주춤해지게 된 건 물론
이었다.

이렇게 현직 총리도, 정계의 최고실력자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는 집단
이 일본의 관료들이다.

그들은 국민들의 여론조차도 "중우화"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관료를 비판하는 기사나 글들이 대유행이다.

"정부의 호송선단식 은행과보호행정이 일본의 금융산업을 망가뜨렸다.
대장성을 즉각 분할해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야 한다"

"국제분업과 자유무역이 요구되는 시대에 모든 산업을 육성한다는 통산성의
발상은 시대착오다. 통산성은 해체돼야 한다"(PHP연구소)

"각 행정부처가 자기 관할권의 논리만 내세워 정책의 기동성을 잃고 있다.
부처의 대폭 통폐합을 통해 조직을 축소해야 한다"(가토 일게이오대교수)는
주장이 거침없이 제기되고 있다.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신통하게도 우리와 닮은 꼴을 이루고 있다.

"지나친 규제" "부처할거주의" "불투명한 행정" 등등.

그러나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판이한 차이가 한가지 있다.

최소한 일본에서는 "복지부동"이란 말은 없다는 점이다.

우리관료들처럼 "세월아 가라"며 바짝 엎드려 있는 모습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복지부동은 커녕 "우리가 아니면 안된다"는 관료들의 지나친 열성이
오히려 "망국론"을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라는 역설적 진단도 가능하다.

관료집단의 자부심과 엘리트의식은 일본사회내의 어느 계층보다도 강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걸 뒷받침하는게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인사관리제도다.

우선 관료들의 승진이 우리처럼 장관 1인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계장(사무관)이하는 국장이 하되 과장대리(서기관)이상은 각 부처의
인사과가 한다.

물론 평가기준도 투명하다.

<>근속연수및 연령 <>관련업무경험 <>근무실적 <>업무관련 지식과 기술
<>판단및 실천능력 <>교육지도력및 관리능력 <>인격및 성격 <>건강등 복잡
다양한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치열한 내부경쟁을 거쳐 간부로 승진해 살아남는 관료들인 만큼 능력도
있다.

자존심이 셀 수 밖에 없고 패기와 용기면에서도 남다를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일본의 관료다.

그러니까 일본의 관료개조론은 이같은 "적극성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처럼 복지부동의 세월속에 면피주의에서 초래되는 "소극성에 대한
비판"과는 분명히 다르다.

<정리=이학영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