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문단에 자신과 이웃을 함께 돌아보는 성찰의 시집 4권이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내놓은 천양희씨의 "마음의 수수밭" 김준태씨의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강세환씨의 "바닷가 사람들" 나희덕씨의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등이 화제의 시집.

이들 시집은 휴머니즘과 우리의 정서를 소박한 언어로 표현한 서정시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끌고있다.

천양희씨의 "마음의 수수밭"은 한여성이 지닐 수 있는 발랄한 생명력을
50세가 넘어 느낀데서 비롯된 절망및 외로움과 접목시킨 독특한
시풍을 선보이고있다.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직소포에 들다"
에서) 이 시에서 "다람쥐가~"부분은 작고한 시인 김남주씨가 감탄한
구절로 유명하다.

"직소포에 들다"에서 숲과 바다의 생기와 살아있음의 환희를 노래하는
천씨는 또다른 시에서 도난당한 나이와 그러나 결코 좌절할수 없는
내면의 풍경을 노래한다.

"나에게는 다시 써야할 생이 있다/세상이 잘못 읽은 나의 생/수몰된
생/암매장된 생/누가 읽기도 전에 나를 써버렸다/그들에게 도난당한
장편의 문장들/그때문에 틀린 새의 제목들/내 생,너무 오래 생매장되었다"
("아침마다 거울을"일부)

등단 25년만에 열번째시집을 출간한 김준태씨의 경우 "왜 새들은/안보이는
나라로까지 날아가서 죽을까/그 마음을 아는 나뭇잎들이/땅에 떨어져.
갈곳을 몰라하는/벌레들의 뒷등을 덮어준다"(무제)며 문명에 쫓겨나는
자연을 안타까와한다.

김씨는 자연과 옛사람들을 동일시하며 옛정과 터전의 소멸은 이름
붙일수 없는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고 표현한다.

두번째시집을 낸 강세환씨는 고향인 주문진을 배경으로 "어머니의
쓸쓸한 자궁같은 바다"에 기대어 힘겹게 살아가는 소외된 이웃의
모습을 자신의 황폐한 내면에 비춰 그려내고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뱃길 저만큼 남겨두고/바다를 떠나야 하다니
/저렇게 얼마쯤 남겨두고/떠나는 것이 인생이더냐"("하선"에서)

나희덕씨는 두번째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서 나이 들수록
뻔해지는 삶의 내용물과 뼈마디가 갈라지도록 내리누르는 삶의 무게
밑에서도 의연하게 입술을 질끈 깨무는 인내의 모습을 내비친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아름다웠던 한마디/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에서)

이들 시집은 지난 시대를 지배했던 거창한 이념이나 사회문제를 다룬
시들과 달리 자연을 매개로 내면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