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노랭이작전으로 사업개시 20년만에 미국에서 가장 큰 전세항공회사
의 주인이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미켈슨스회장이 자기사업을 시작한 때는 지난 73년.
30대초반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항공여행사 소속비행사로 근무할 때만해도
월급쟁이 비행사가 천직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천신만고끝에 기회의 땅 미국에 이민온 그의 혈기는 곧 억만장자가
되겠다는 어릴적 꿈을 되살리게 했다.
36세되던해 미련없이 사표를 내던지고 독립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그가 갖고 있었던 재산은 월 2만달러에 리스한 1백79석의 중고 보잉
720 한대가 전부였다.
그것도 자신의 집을 두번이나 저당잡혀 마련한 것.
바하마군도와 플로리다주 올란도가 포함된 패키지여행상품을 판매하면서
부터 그의 노랭이작전은 시작됐다.
여행객들을 공항까지 낡은 통학용 버스로 실어나르고 자신의 몸집만한
짐도 손수 처리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호텔까지 안내하고 관광가이드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1인4역하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직원을 따로 둘수 없을
정도로 가진게 없었으니 내몸으로 때울수 밖에요. 한가로이 담배한대 피워
물 시간조차 없었지요. 하루가 1년같았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나 라트비아에서 독일과 호주를 거쳐 60년 미국땅에 발을 딛기까지
가족과 함께 겪어야했던 생활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보잘것없는 출발이었지만 땀을 흘린만큼 돈을 벌수 있는
내사업이었기에 어떤 어려움도 견딜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여행객들은 끊이지 않았고 사업은 날로 커갔다.
하루일과를 끝내기 바쁘게 은행에 들렀다.
돈이 쌓여갔다.
동전한푼도 헛쓰는 일이 없었다.
"손에 쥐어지는 돈이란 돈은 모두 재투자했습니다. 가족들까지도
우스갯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노랭이란 소리를 할 정도였지요"
최대의 사업기반인 비행기수가 늘어갔다.
지난해까지 16대의 보잉727과 6대의 보잉757, 그리고 13대의 록히드1011등
모두 35대의 비행기를 갖게 됐다.
5개의 도시에서 미전역 4백여곳의 휴양지로 이들 비행기를 띄웠다.
어느 항공사도 제공할수 없는 저가격의 최고급 여행상품개발에 잇따라
성공했다.
화물운송사업도 기대이상의 몫을 해냈다.
군에도 비행기를 리스하는등 리스사업부문도 마찬가지였다.
걸프전 당시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모두 4백94편을 운항, 1억달러를 벌어
들였다.
"지난 한햇동안 실어나른 승객은 모두 3백만명에 달합니다. 4억6천7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습니다. 사업초기만해도 이렇게까지 클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미켈슨스회장은 이를 기반으로 정기항공서비스 제공에도 나서는등 또다른
사업영역에 손을 댔다.
유나이티드항공 US에어등 기존 대형항공사의 견제가 두려워 미뤄왔던
사업이었으나 싼가격을 무기로 밀어붙인다면 못할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86년 인디애나폴리스를 기점으로 몇개의 정기노선사업에 착수했다.
92년 한차례 노선을 확장, 이제는 시카고 밀워키 보스턴 필라델피아에서도
하와이 플로리다 멕시코등의 주요 휴양도시에 정기편을 취항시키는등 빠르게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지난해 3천7백만달러를 증자했다.
미켈슨스회장은 이사업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다.
항공업계 거인들을 대상으로한 생애 두번째 도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사를 통해 고객을 모으는 한편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 3백명의
여직원을 고용, 여행객들을 직접 챙겼다.
최근에는 TV 라디오 전단광고비용으로 한해평균 7백만달러란 많은 돈을
쏟아붓고 있다.
대형항공사의 광고판촉비에 비해서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이지만 고객을
끌어모으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조직도 여전히 단촐하게 유지, 알짜사업을 꾸려갈수 있었다.
올 상반기에는 지난해보다 20%나 늘어난 2억8천4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미켈슨스회장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대형항공사들의 항공요금인하경쟁이 불붙을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30대 첫사업을 일구던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게 미켈슨스회장의 생각이다.
< 김재일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