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순리를 좇아야지 역행하면 안되는 법이여.
정부가 감놔라 대추놔라하면 안돼. 그러면 체질이 약해지게 마련이거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지난 30년을 한결같이 한국경제신문과 함께 하루를
시작해온 원용채옹(74.무직.전북 고창군 흥덕면)은 나름대로 터득한
자신의 경제관을 밝혔다.

64년 10월12일(당시 일간경제신문) 창간이후 한국경제신문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구독해온 창간독자 원옹에게 한국경제신문은 불혹의 나이를
지나 뒤늦게 본 늦깍이 동반자이자 분신이다.

동양사상에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원옹의 4평남짓한 서재에 그윽한
묵향기와 함께 정갈하게 정리돼 있는 주역, 주자대전등 동양학서적과
손떼묻은 경제서적들, 바둑판, 한국경제신문의 모습이 원옹의 단정한
생활을 짐작케한다.

처음 친구인 박병원 한국경제신문 고창지국장(78)의 권유로
한국경제신문을 받아보게 된 원옹은 "활자때문인지 신문도 마약인
것같아. 이제는 하루라도 안보면 속이 얹힌 것같고 울렁증마저 들어"
라며 웃음짓는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 30년동안 원옹에게 단순히 정보전달 기능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상념에 잠길 때면 마루에 앉아 수십편의 한시를 읊으며 마음을 가라
앉히는 원옹은 "한국경제신문은 때로는 벗이 되어,때로는 인생 지침서로,
때로는 경제 교과서로 아침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원옹은 "웬만한 경제동향 파악은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며 "특히
해설과 기획시리즈등 경제관련기사외에 "천자칼럼" "한경칼럼" 등
고정란을 꼼꼼히 읽고 있어 주변의 친구들을 만나도 대화거리가
풍부하다"며 고마워했다.

"맨처음 한국경제신문을 받아볼 때하고는 상황이 너무 달라졌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경제지로 발돋움하고, 또 줄곳 한국경제의 발전을
선도해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아주 흐뭇했어"

원옹은 특히 한국경제신문이 문민정부 출범 이후 금융실명제 관련 기획
기사를 계속 다루며 금융실명제에 지대한 관심을 쏟더니 어렵게만 생각
됐던 금융실명제가 실시돼 독자로서 가슴 뿌듯함마져 느꼈다고 한다.

"그때는 신문사에 참 전화 많이 했어. 심지어 오늘 아침에 나갔던
금융실명제기사 내일자에 똑같이 실어달라고도 했지. 왜냐면 그런
기사는 국민들이 죄다 봐야하거든"

원옹이 경제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는 한국경제신문이 국내최초의 경제지
로 탄생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원옹은 밝히기를 꺼려하는 집안사정으로
어린 나이에 가계를 떠맡게 됐다.

다행히 논.밭등 선친께서 물려주신 재산이 있어 뼈저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으나 본인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면사무소에서 호적계로 일하며 "고생"
을 가르치기 위해 어린 동생들에게 점심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다고 한다.

"먹을 것 안먹고,입을 것 입지않으며 동생들을 가르치고, 저축을 했는데
해방되고, 6.25한국전쟁,5.16혁명등 혼란을 겪고나니까 인플레로 돈이
죄다 썩어버렸어. 그래서 경제를 알아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또한 8남매를 두고 있는 원옹은 "큰아들은
서울대병원에 있고, 둘째아들은 일본 경도대학 교환교수로 있어. 세째놈도
부천에서 치과병원하고 있고. 죄다 밥벌이하면서 부모한테 효도할 줄알고
잘 살고있어. 어려서부터 눈이 익어서인지 우리 아이들도 한국경제신문만
보고있어"

"한국경제신문이 금융실명제 밀어부친 것처럼 앞으로는 우리나라가 윤리
와 도덕이 살아있는 건강한 경제체질을 갖도록 선도해줘. 그리고 조국
통일이 빨리돼야지. 통일에 대비한 경제구조를 갖도록 힘써주고" 원옹은
지난해 8월8일자 한국경제신문을 뒤적이며 이같이 당부했다.

지난 30년동안 한결같이 한국경제신문을 구독해온 원용채옹은
"한국경제신문은 이제 나의 분신이자 동반자"라며 앞으로 우리나라가
건강하면서 통일에 대비한 경제체질을 갖추도록 선도해달라고 당부했다.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