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3년 7월5일.

한.미정상회담을 위해 방한하는 빌 클린턴 미대통령의 숙소로 예정됐던
서울남산의 그랜드 하얏트호텔.

"꽝"하는 폭발음과 함께 호텔로비의 바닥이 내려않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3명이 중경상을 입고 1백40여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호텔측은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 호텔시설전반에 대한 긴급보수를 나섰다.

이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호텔보수를 맡은 계선산업(대표 장충섭.55)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이회사는 지난89년 호텔 사무실등에 내장재를 공급하는 업체로는 최초로
1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내년1월로 설립 30주년을 맞는 이회사는 당시만해도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계선산업은 지난 65년 장충섭사장이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 반도아케이드의
창고를 개조한 "엘리건스"라는 조그마한 작업장이 모태가 됐다.

한양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건축회사에서 인테리어를
배운 그는 국내에 "인테리어"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기에 귀국, 후배
한명과 함께 작업에 몰두했다.

"돈벌이"에는 관심도 없는 장사장이 계선산업을 설립하게 된것은 현실적인
생계가 원인이 됐다.

작업장을 운영하기 위해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약간의 수익사업에 시간을
쪼개야 했다.

장사장은 전기스텐드 거실용의자등 1-2건의 물품을 주문받아 개인고객들
에게 납품했다.

변변찮은 작업도구와 재료도 없는 그 시절 장사장은 목공소와 철공소를
뛰어다니며 재료를 구해 손수 조각하고 도색하는 일을 도맡았다.

서구적인 인텔리어가구를 처음 접해본 고객들 사이에서 장사장의 이름은
퍼져 나갔다.

주문이 밀려들자 장사장은 작업장을 확대하고 인력을 충원했다.

자신이 제작과정을 감독하고 재료구입과 세공을 담당할 3명의 목수들이
직원의 전부였다.

그러나 영원히 소형가구제작소에 머물렀을 "엘리건스"가 연간 매출액이
2백50여억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게 된것은 장사장의 좌절감에서
비롯됐다.

자신이 설계하고 조각한 작품들이 고객들에겐 큰 호응을 얻었지만 장사장
은 재료와 작업도구의 미비로 의도된 효과를 얻지못해 예술인 특유의
좌절감을 느꼈다는 것.

이를 계기로 직접 재료와 물감을 생산해 내장공사와 가구제조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담당한다는 구상을 키워나갔다.

지난 75년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 184-2번지 일대에 소규모 공장을 세워
그 꿈을 본격화했다.

79년 9월에는 회사명을 엘리건스에서 지금의 계선산업으로 개명했다.

인테리어 업계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선두를 고수하자는 뜻이었다.

88년에는 사무용가구를 생산하는 자회사 계선오피스시스템스를 설립했다.

이와함께 최고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지난 88년엔 대기업조차도 이해가
부족했던 구역내통신망(LAN)을 개발에 착수, 컴퓨터를 이용해 설계도면을
제작하고 공간을 레이아웃하는 일괄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소사장제를 도입,사내전문가들을 독립시켜 설계는 본사가 담당하고
부품과 완제품은 협력회사가 생산하는 체제를 갖췄다.

현재 이회사에서 독립,인테리어업계의 10대상위에 오른 회사만도 3개사.

또 협력회사는 1백여개에 이른다.

그러나 장사장은 신세계백화점 미아점, 아주대부속병원, 동양증권 여의도
사옥, 힐튼호텔, 웨스틴조선호텔, 서울프라자호텔, 스위스그랜드호텔,
쉐라톤워커힐호텔등 국내 주요호텔과 건물의 인텔리어를 수주해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지만 못다이룬 꿈이 있다.

인텔리어의 개념도 희박하고 전문인력이 절대부족한 국내실정을 감안,
미국의 "아트센터"같은 권위있는 인테리어전문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이를위해 장사장은 "아트센터"임원들과 꾸준히 접촉중이다.

또 지난 91년 이천에 공장을 세울때 학교설립을 염두에 둬 실습장과 회의실
자료실등 관련시설을 조성했다.

학교설립이 승인되고 공장부지내에 기숙사만 지으면 그의 꿈은 일단
이루어지는 셈이다.

<김태철기자>

(한국경제신문 1994년 10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