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금융실명제] (3) 왜 8.12(목)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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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8월12일 오락가락 하는 비가 며칠째 이어지면서 후덥지근하고 짜증나는
날이었다.
하늘은 몹시도 찌푸둥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전날 끝난 공직자재산등록과 그날 있었던 대구동을과
춘천의 보선결과에 온통 쏠려있었다.
보선투표가 막 끝나고 개표를 시작할 오후7시무렵 언론매체들은 "쇼킹"한
뉴스를 쏟아냈다.
실명제 전격실시-.
시민들의 첫번째 반응은 "역시 YS답다"였다.
군인사등에서 보여줬듯 "결국 실명제도 전격적이고 과감하게 하는구나"
"속이 시원하다"는 등.
두번째 반응도 "역시 YS답다"였다.
새정부들어 두번째로 치러진 그날의 "선거행사"는 여러모로 김영삼정부의
스타일을 구길게 확실시 되고 있었다.
그날 보선은 탈법 불법이 난무했던데다 대구동을에서는 민자당후보의
패색이 완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거의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국면을 전환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YS의 승부수에 놀랐다는 뜻이다.
2월25일 "개혁"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정부가 출범하면서 실명제는 "시기"가
문제였지 실시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D데이"가 왜 보궐선거 날인 "8월12일"이어야만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택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진 걸까.
김영삼대통령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긴급재정경제
명령"을 발동한 직후인 오후8시10분 광화문 정부종합1청사에서 열린 이경식
부총리와 홍재형재무부장관의 합동기자회견에서도 역시 첫 질문은 "택일"에
관한 것이었다.
"실명제실시날짜를 8월12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부총리는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한다.
이부총리의 답변이 미진해 보였는지 홍장관이 보충설명을 한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기존자료를 검토해본 결과 우선 8월중에 실시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발표날짜는 주말에 하는 것이 통례여서 14일(토)도
생각했으나 국경일(15일이 광복절)과 겹쳐 피했다.
13일도 생각했으나 다음날이 토요일이어서 택할 수 없었다. 토요일엔 금융
기관이 오전만 문을 여는데 금융기관에 전달교육을 하려면 적어도 한나절은
걸린다.
그렇게 되면 14일엔 금융기관이 문을 열 수 없다. 금융거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결국 12일을 택했다"
사실 실명제 실시시기에 대해선 대통령 취임직후부터 논란이 있었다.
처음에는 "5월 추진설"이 유력했다.
5월설의 발단은 3월3일 열린 김영삼정부 첫 경제장관회의였다.
"회의가 끝나고 장관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실명제 얘기가 나왔어요.
그때 부총리가 ''실명제는 빨리 하는게 좋으니 다음달까지 준비하자''고
했지요. 그러나 나는 ''실명제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두달은 걸립니다''고
대답했어요"(홍재형재무부장관)
이런 감은 그날 경제기획원 출입기자들에 대한 경제장관회의 브리핑에서도
그대로 전달된다.
브리핑은 장승우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현 국회예결위전문위원)이 했다.
장국장이 설명한 보도자료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실명제는 가능한한 조기에 실시하되 충격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과 시기를 선택한다".
기자들은 당연히 더 캐물었다.
장국장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5월까지 실명제의 실시방법과 실시일정을 마련할 계획이다"
"꽤 구체적"인 얘기였고 큰 뉴스였다.
이튿날 신문에는 "5월까지 실명제실시방법 확정"이라는 제목들이 큼지막한
활자로 찍혀나왔다.
며칠뒤 이부총리는 "나는 실명제의 실시방법과 일정을 5월까지 마련하겠다
고 말한 적이 없다"며 극구 부인하고 나선다.
결국 아무일 없이 5월은 지나간다.
대통령취임 1백일을 맞아 한차례 전격 실시설이 나돌았지만 김대통령은
계속 "실시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여론은 이때 다시 비등한다.
"김영삼정부도 실명제에 관한한 과거 정권처럼 미루적거리며 오리무중으로
끌고 가다가 실명제로 만들거다"는 식으로.
여론을 등에 업은 경실연이 실명제 조기실시를 들고 나오고 야당도 이에
가세한다.
이기택민주당대표도 대통령에게 실명제조기실시를 건의했다.
그래도 대통령은 "하긴 한다. 다만 시기는 나에게 맡겨 달라"는 원칙론만
되풀이한다.
대통령은 그러나 "실명제 실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9월 정기국회를
의식한다.
그때 이부총리가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에 해야 한다"고 주장(6월29일
대통령독대때)했으니 김대통령이 "나와 생각이 똑같다"고 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명제실시시기가 8월로 "택월"된 것이다.
8월 낙점을 받은 이부총리는 KDI(한국개발연구원)팀이 만든 실명제 1차
시안을 7월8일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 시안에는 시행일자가 21일(토요일)로 찍혀 있었다.
공직자재산공개(9월1일)와 정기국회개원(9월10일)등 정치적인 일정을
고려한 것이다.
국회가 열리기 최소한 보름전에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부총리는 21일이 어려우면 다음 토요일인 28일을 차선책으로 대통령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부총리는 왜 토요일을 찍었을까.
"긴급명령을 선포하려면 임시각의가 소집되어야 하고 뒤이어 대통령특별
담화와 관계장관 기자회견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행사들을 준비하다
보면 금융실명제의 실시사실이 몇시간전에라도 사전누설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금융기관의 영업이 종료되고도 시간여유가 많은 토요일로 날짜를
잡은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5시께 임시각의를 소집하면 별문제가 없을
테니까요"(이부총리)
이부총리는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안을 다음날(9일) 양수길자문관을 통해
홍재형재무부장관과 김용진세제실장에게 설명토록 한다.
그러나 청와대를 나오면서 당초 시안에 적힌 시행일자는 쏙 빠진다.
"각하께서 ''날짜는 당신하고 나하고만 알고 있는거야''라며 신신당부했었기
때문"(이부총리)이다.
94년초 실명제실시설도 끈덕지게 나돌았다.
"재무부는 긴급명령보다는 법률로 실명제를 실시하는 방안을 고려했어요.
그럴 경우 법률을 가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더라도 실명제는 빨라야
94년초에 실시된다는 계산이 나오지요"(이환균관세청장.당시 재무부
제1차관보)
그러나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있는 시안을 넘겨받으면서 재무부도 어렴풋이
8월실시에 대한 감을 잡는다.
김진표 당시 세제심의관(현 국방대학원파견중)은 감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재무부는 7월 9일 대통령으로부터 실명제실시에 대한 공식 오더를
받았어요. ''종합과세와 분리해서 하는데 긴급명령으로 한다''는 것이 핵심
이었죠. 물론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요. 그러나 긴급명령으로 하면
국회가 열리기 전에 해야 하기 때문에 8월말이나 9월초가 아닐까 짐작
했지요"
홍장관의 얘기도 비슷하다.
"실명제 준비가 두달가량은 되어야 하는 만큼 실무적으로도 8월말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마음속으로 8월27일이나 28일을 시행일로 잡고
있었어요"
어쨌든 김대통령 이부총리 홍장관은 실시시기를 8월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름휴가를 전후해서 시기를 앞당기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
"대통령께서 휴가를 떠나는 날인 7월30일 아침 7시께 였어요. 각하가
우리집으로 전화를 걸어 ''D-데이를 앞당길수 있도록 작업을 하라''고 지시
했지요. 휴가를 다녀온 대통령은 8월4일 ''언제쯤 최종보고가 가능하냐''고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이부총리는 실명제 작업팀에게 "9일이후에는
언제든지 실시할수 있도록 작업을 끝내라"고 독려한다.
그리고는 가장 빠르게 실시할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 다시 따지기
시작한다.
"시기연구"에 들어갔다고나 할까.
시기연구의 결론을 이부총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무작업팀에선 D-데이, H-아워가 결정되면 48시간전에 통보해 달라고
나에게 요청했어요. 자료인쇄등 그야말로 실무작업을 마무리 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대통령 최종보고일이 9일이므로 10일(화요일)은 그래서 불가능하고 다음날
인 11일(수요일)은 선거 전날이 아닙니까. 이날 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적
으로 오해를 받을게 분명해 이날도 피했지요"
이부총리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남은 날은 선거당일인 12일(목)과 13일(금)14일(토) 3일뿐이었죠. 그러나
금요일 실명제를 발표하면 토요일 하루 금융기관이 문을 닫아야 해요.
토요일 오후에 금융기관보고 문을 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좋기는 토요일이 제일 좋았지요. 실무작업팀에서도 원래 토요일을 생각
했어요. 그런데 일요일이 광복절인게 걸렸어요. 문민정부 첫 경축일이라
외국사절을 초청해 놓고 전날 실명제를 실시한다. 광복절(일요일) 하루가
얼마나 혼란스러울겁니까"
홍재무부장관도 "국제금융시장도 고려했습니다. 12일 실시할 경우 금요일인
13일 오후엔 금융기관들이 문을 열수 있으므로 국제거래에도 차질을 빚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요.
당초 KDI시안에선 실명제 발표후 3일간 증시등 금융기관의 문을 닫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이는 오늘날의 금융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지요"
라고 말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부총리와 홍장관은 9일 대통령보고에서 12일 실시를
건의한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대통령의 답은 "그렇게 합시다"(이부총리.홍장관)였다.
날짜를 이렇게 급하게 잡은데는 "보안"탓도 있었다.
"실명제는 8월초에 작업이 거의 다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때부터 실무자들
은 보안 노이로제에 걸리기 시작했어요. 가능한한 빨리 실시하자는 의견을
제시할 수 밖에요. 이 의견을 대통령께도 전달했습니다"(홍장관)
그러나 김대통령은 실명제발표 다음날인 13일 오전 수석비서관들과의
자리에서 시기결정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그간 실시시기를 놓고 고민해 왔는데 공직자들의 재산등록이 끝나는 때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궐선거가 끝나는 시기를 택한 것은 공연히
선거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비치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같은 말은 "택일"이 반드시 실무적으로만 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박재윤경제수석도 "실명제는 당초 8월말께 전격 실시하려 했으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자신이 없어 앞당겨진 것으로 알고있다"(94.6.11 한국금융학회
세미나에서)고 말했다.
실명제가 선거패배국면에서 벗어나려는 "국면전환용"카드로도 사용됐음을
시사한 말이다.
정치적 부담뿐만 아니라 경제실책에 대한 국면전환용이라는 지적도 있다.
재계의 한 논객은 이렇게 분석한다.
"대통령은 취임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제를 빨리 회복시키려고 생각한 듯
해요. 금융실명제는 단기적으로 경제회복에 마이너스 효과를 초래하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빨리 실시할 생각은 갖지 않았을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경제1백일계획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차제에 언젠가는 실시해야
할 실명제를 서둘렀던 것 아닐까요"
대통령 휴가기간중 발행된 한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이같은 재계인사의
분석에 설득력을 더해 준다.
"...우리나라 경제의 ''불쾌지수''가 여전히 높기만 하다. 금리상승과 주가
하락이 계속 겹치는 이상전선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개선되는듯 했던
경상수지는 다시 악화됐고 실업률은 6년만의 최고치인 3.2%에 이르러...
새정부 출범이후의 1백일계획과 신경제5개년계획은 아직 그 효과를 기대하기
이르나 5개년계획을 바라보는 학계 재계의 반응은 다분히 비판적 냉소적
이어서 앞으로 각 경제주체들의 신경제 ''동참''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날이었다.
하늘은 몹시도 찌푸둥했다.
사람들의 관심은 전날 끝난 공직자재산등록과 그날 있었던 대구동을과
춘천의 보선결과에 온통 쏠려있었다.
보선투표가 막 끝나고 개표를 시작할 오후7시무렵 언론매체들은 "쇼킹"한
뉴스를 쏟아냈다.
실명제 전격실시-.
시민들의 첫번째 반응은 "역시 YS답다"였다.
군인사등에서 보여줬듯 "결국 실명제도 전격적이고 과감하게 하는구나"
"속이 시원하다"는 등.
두번째 반응도 "역시 YS답다"였다.
새정부들어 두번째로 치러진 그날의 "선거행사"는 여러모로 김영삼정부의
스타일을 구길게 확실시 되고 있었다.
그날 보선은 탈법 불법이 난무했던데다 대구동을에서는 민자당후보의
패색이 완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거의 결과가 발표되기 전에 국면을 전환시키려는" 의도가 담긴
YS의 승부수에 놀랐다는 뜻이다.
2월25일 "개혁"의 기치를 내건 김영삼정부가 출범하면서 실명제는 "시기"가
문제였지 실시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 "D데이"가 왜 보궐선거 날인 "8월12일"이어야만
했느냐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문부호"를 달고 있다.
"택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진 걸까.
김영삼대통령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대통령긴급재정경제
명령"을 발동한 직후인 오후8시10분 광화문 정부종합1청사에서 열린 이경식
부총리와 홍재형재무부장관의 합동기자회견에서도 역시 첫 질문은 "택일"에
관한 것이었다.
"실명제실시날짜를 8월12일로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이부총리는
"가장 적기라고 생각했다"고 대답한다.
이부총리의 답변이 미진해 보였는지 홍장관이 보충설명을 한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기존자료를 검토해본 결과 우선 8월중에 실시하는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발표날짜는 주말에 하는 것이 통례여서 14일(토)도
생각했으나 국경일(15일이 광복절)과 겹쳐 피했다.
13일도 생각했으나 다음날이 토요일이어서 택할 수 없었다. 토요일엔 금융
기관이 오전만 문을 여는데 금융기관에 전달교육을 하려면 적어도 한나절은
걸린다.
그렇게 되면 14일엔 금융기관이 문을 열 수 없다. 금융거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결국 12일을 택했다"
사실 실명제 실시시기에 대해선 대통령 취임직후부터 논란이 있었다.
처음에는 "5월 추진설"이 유력했다.
5월설의 발단은 3월3일 열린 김영삼정부 첫 경제장관회의였다.
"회의가 끝나고 장관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실명제 얘기가 나왔어요.
그때 부총리가 ''실명제는 빨리 하는게 좋으니 다음달까지 준비하자''고
했지요. 그러나 나는 ''실명제를 준비하려면 적어도 두달은 걸립니다''고
대답했어요"(홍재형재무부장관)
이런 감은 그날 경제기획원 출입기자들에 대한 경제장관회의 브리핑에서도
그대로 전달된다.
브리핑은 장승우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현 국회예결위전문위원)이 했다.
장국장이 설명한 보도자료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실명제는 가능한한 조기에 실시하되 충격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과 시기를 선택한다".
기자들은 당연히 더 캐물었다.
장국장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5월까지 실명제의 실시방법과 실시일정을 마련할 계획이다"
"꽤 구체적"인 얘기였고 큰 뉴스였다.
이튿날 신문에는 "5월까지 실명제실시방법 확정"이라는 제목들이 큼지막한
활자로 찍혀나왔다.
며칠뒤 이부총리는 "나는 실명제의 실시방법과 일정을 5월까지 마련하겠다
고 말한 적이 없다"며 극구 부인하고 나선다.
결국 아무일 없이 5월은 지나간다.
대통령취임 1백일을 맞아 한차례 전격 실시설이 나돌았지만 김대통령은
계속 "실시할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여론은 이때 다시 비등한다.
"김영삼정부도 실명제에 관한한 과거 정권처럼 미루적거리며 오리무중으로
끌고 가다가 실명제로 만들거다"는 식으로.
여론을 등에 업은 경실연이 실명제 조기실시를 들고 나오고 야당도 이에
가세한다.
이기택민주당대표도 대통령에게 실명제조기실시를 건의했다.
그래도 대통령은 "하긴 한다. 다만 시기는 나에게 맡겨 달라"는 원칙론만
되풀이한다.
대통령은 그러나 "실명제 실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9월 정기국회를
의식한다.
그때 이부총리가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에 해야 한다"고 주장(6월29일
대통령독대때)했으니 김대통령이 "나와 생각이 똑같다"고 한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명제실시시기가 8월로 "택월"된 것이다.
8월 낙점을 받은 이부총리는 KDI(한국개발연구원)팀이 만든 실명제 1차
시안을 7월8일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 시안에는 시행일자가 21일(토요일)로 찍혀 있었다.
공직자재산공개(9월1일)와 정기국회개원(9월10일)등 정치적인 일정을
고려한 것이다.
국회가 열리기 최소한 보름전에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부총리는 21일이 어려우면 다음 토요일인 28일을 차선책으로 대통령에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부총리는 왜 토요일을 찍었을까.
"긴급명령을 선포하려면 임시각의가 소집되어야 하고 뒤이어 대통령특별
담화와 관계장관 기자회견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행사들을 준비하다
보면 금융실명제의 실시사실이 몇시간전에라도 사전누설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금융기관의 영업이 종료되고도 시간여유가 많은 토요일로 날짜를
잡은 것입니다. 토요일 오후5시께 임시각의를 소집하면 별문제가 없을
테니까요"(이부총리)
이부총리는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안을 다음날(9일) 양수길자문관을 통해
홍재형재무부장관과 김용진세제실장에게 설명토록 한다.
그러나 청와대를 나오면서 당초 시안에 적힌 시행일자는 쏙 빠진다.
"각하께서 ''날짜는 당신하고 나하고만 알고 있는거야''라며 신신당부했었기
때문"(이부총리)이다.
94년초 실명제실시설도 끈덕지게 나돌았다.
"재무부는 긴급명령보다는 법률로 실명제를 실시하는 방안을 고려했어요.
그럴 경우 법률을 가을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더라도 실명제는 빨라야
94년초에 실시된다는 계산이 나오지요"(이환균관세청장.당시 재무부
제1차관보)
그러나 대통령의 사인이 들어있는 시안을 넘겨받으면서 재무부도 어렴풋이
8월실시에 대한 감을 잡는다.
김진표 당시 세제심의관(현 국방대학원파견중)은 감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재무부는 7월 9일 대통령으로부터 실명제실시에 대한 공식 오더를
받았어요. ''종합과세와 분리해서 하는데 긴급명령으로 한다''는 것이 핵심
이었죠. 물론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요. 그러나 긴급명령으로 하면
국회가 열리기 전에 해야 하기 때문에 8월말이나 9월초가 아닐까 짐작
했지요"
홍장관의 얘기도 비슷하다.
"실명제 준비가 두달가량은 되어야 하는 만큼 실무적으로도 8월말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마음속으로 8월27일이나 28일을 시행일로 잡고
있었어요"
어쨌든 김대통령 이부총리 홍장관은 실시시기를 8월말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은 여름휴가를 전후해서 시기를 앞당기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
"대통령께서 휴가를 떠나는 날인 7월30일 아침 7시께 였어요. 각하가
우리집으로 전화를 걸어 ''D-데이를 앞당길수 있도록 작업을 하라''고 지시
했지요. 휴가를 다녀온 대통령은 8월4일 ''언제쯤 최종보고가 가능하냐''고
다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이부총리는 실명제 작업팀에게 "9일이후에는
언제든지 실시할수 있도록 작업을 끝내라"고 독려한다.
그리고는 가장 빠르게 실시할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 다시 따지기
시작한다.
"시기연구"에 들어갔다고나 할까.
시기연구의 결론을 이부총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실무작업팀에선 D-데이, H-아워가 결정되면 48시간전에 통보해 달라고
나에게 요청했어요. 자료인쇄등 그야말로 실무작업을 마무리 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대통령 최종보고일이 9일이므로 10일(화요일)은 그래서 불가능하고 다음날
인 11일(수요일)은 선거 전날이 아닙니까. 이날 실명제를 실시하면 정치적
으로 오해를 받을게 분명해 이날도 피했지요"
이부총리의 설명은 계속 이어진다.
"남은 날은 선거당일인 12일(목)과 13일(금)14일(토) 3일뿐이었죠. 그러나
금요일 실명제를 발표하면 토요일 하루 금융기관이 문을 닫아야 해요.
토요일 오후에 금융기관보고 문을 열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좋기는 토요일이 제일 좋았지요. 실무작업팀에서도 원래 토요일을 생각
했어요. 그런데 일요일이 광복절인게 걸렸어요. 문민정부 첫 경축일이라
외국사절을 초청해 놓고 전날 실명제를 실시한다. 광복절(일요일) 하루가
얼마나 혼란스러울겁니까"
홍재무부장관도 "국제금융시장도 고려했습니다. 12일 실시할 경우 금요일인
13일 오후엔 금융기관들이 문을 열수 있으므로 국제거래에도 차질을 빚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지요.
당초 KDI시안에선 실명제 발표후 3일간 증시등 금융기관의 문을 닫는
것으로 돼 있었으나 이는 오늘날의 금융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지요"
라고 말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린 이부총리와 홍장관은 9일 대통령보고에서 12일 실시를
건의한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대통령의 답은 "그렇게 합시다"(이부총리.홍장관)였다.
날짜를 이렇게 급하게 잡은데는 "보안"탓도 있었다.
"실명제는 8월초에 작업이 거의 다 끝난 상태였습니다. 이때부터 실무자들
은 보안 노이로제에 걸리기 시작했어요. 가능한한 빨리 실시하자는 의견을
제시할 수 밖에요. 이 의견을 대통령께도 전달했습니다"(홍장관)
그러나 김대통령은 실명제발표 다음날인 13일 오전 수석비서관들과의
자리에서 시기결정에 관해 이렇게 밝혔다.
"그간 실시시기를 놓고 고민해 왔는데 공직자들의 재산등록이 끝나는 때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궐선거가 끝나는 시기를 택한 것은 공연히
선거인심이나 쓰는 것처럼 비치는게 싫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이같은 말은 "택일"이 반드시 실무적으로만 되지 않았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박재윤경제수석도 "실명제는 당초 8월말께 전격 실시하려 했으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자신이 없어 앞당겨진 것으로 알고있다"(94.6.11 한국금융학회
세미나에서)고 말했다.
실명제가 선거패배국면에서 벗어나려는 "국면전환용"카드로도 사용됐음을
시사한 말이다.
정치적 부담뿐만 아니라 경제실책에 대한 국면전환용이라는 지적도 있다.
재계의 한 논객은 이렇게 분석한다.
"대통령은 취임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경제를 빨리 회복시키려고 생각한 듯
해요. 금융실명제는 단기적으로 경제회복에 마이너스 효과를 초래하는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빨리 실시할 생각은 갖지 않았을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경제1백일계획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차제에 언젠가는 실시해야
할 실명제를 서둘렀던 것 아닐까요"
대통령 휴가기간중 발행된 한 신문의 1면 머리기사는 이같은 재계인사의
분석에 설득력을 더해 준다.
"...우리나라 경제의 ''불쾌지수''가 여전히 높기만 하다. 금리상승과 주가
하락이 계속 겹치는 이상전선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개선되는듯 했던
경상수지는 다시 악화됐고 실업률은 6년만의 최고치인 3.2%에 이르러...
새정부 출범이후의 1백일계획과 신경제5개년계획은 아직 그 효과를 기대하기
이르나 5개년계획을 바라보는 학계 재계의 반응은 다분히 비판적 냉소적
이어서 앞으로 각 경제주체들의 신경제 ''동참''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