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관료는 이러해야 된다"며 정론을 펴왔고, 또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왔다는 상공자원부의 한 "소신파" 관리.

지난주초인가 그는 한 퇴직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무릎을 쳤다.
도대체 무슨 전화를 받았기에 그랬을까.

"삼성문제로 너무 고민할 것 없네. 지금부터 삼성승용차사업 진출에 관한
각 신문의 사설들을 빠뜨리지 말고 잘 모아두게. 논조를 찬성과 반대로
갈라 많은 쪽으로 결정하면 되는거야.

어느쪽으로 결론을 내리든 어차피 얻어맞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이 방법
이야말로 덜 얻어맞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지"

차관보까지 지낸 이 OB는 이처럼 기발한 "여론편승 비법"에 복지안동의
조언도 곁들였다.

"민감한 사안엔 절대로 나서지않는게 좋아. 직업관료는 산업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책결정권자는 더더욱 아닐세. 자기 의견을 내놓지
말라는 말일세.

내 경험으로 보면 이럴땐 물결치는대로 바람부는대로 따라가는게 최고지.
자네는 너무 소신이 강해서 하는 말일세"

허물없는 선후배사이에 오고간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섬뜩한" 기분이
든다.

민의 자율화와 개방화가 추구되면 될수록 "공정한 심판자"로서 관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그런 관료집단의 중진들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그러나 방향이 빗나가도 한참 빗나가 있다.

하기야 이런 책임회피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건설부 어느 국장의
처신은 "관료면피주의"의 전설로 통한다. 업계임원이 건설민원서류를 들고
오면 그는 점잖게 말한다.

"해드리고 싶은데 제 입장도 있고하니 웃분들께 한번 여쭤나 두시죠".
담당차관보나 차관을 만나 내락을 받고는 "웃분들도 긍정적으로 생각
하십디다"고 전하면 이번엔 "우리 과장한테도 말씀을 해놓으셨죠"라고
말한다.

하나의 공식처럼 돼있다.

얼른 보기엔 일처리가 참으로 매끄럽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건
"생색은 내가 내고 책임은 위아랫사람들이"라는 전형적인 면피주의에
다름아니다.

"윗사람 아랫사람 승락을 내가 다 받아내야 한다면 국장은 뭐하라고 있는
건가" S건설회사 임원의 하소연이다.

말썽나지않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은 보수적이라는 관료사회의 속성상
어쩔 수없는 행동양식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런 면피주의가 나라경제의
밑둥부터 흔드는 결과로 이어지는데 있다.

올초 벌어졌던 택시요금인상 파문은 이런 무책임행정이 빚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파문은 경제기획원과 교통부관리들이 채 사전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업계
의 "인상신고서"에 도장을 찍어준데서 비롯됐다.

시간거리 병산에 맞춘 복잡한 미터기를 새로 제작하려면 몇개월이
걸린다는 엄연한 현실이 도외시된 것이다. 왜 그랬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미 장관이 인상약속을 한 일(정재석부총리의 교통부장관 시절)이어서
"내 책임은 없을 것같아" 낼름 도장을 찍어준 것이었다.

"한국방문의 해"를 맞아 교통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서둘러 제작한
주요 도로의 한자표기 입간판도 "시늉만 내는" 면피주의 행정처리가 낳은
꼴불견이다.

"한국방문지년"이란 입간판이 서울 사당전철역이나 동숭동 대학로에 걸려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 거리를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는 사람들조차 이
입간판이 걸려있다는 사실자체를 모를 정도다.

보일락 말락한 작은 글씨로 대충 내걸려있기 때문이다.

상부의 지시가 있으니까 면피용으로 내단 건지, 정말로 외국관광객들에게
정보를 주기위해 내건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 지경이다.

전임 이회창총리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시인했을 정도다. 책임회피를
아예 공식화하는 경우도 잦다.

대표적인게 회의제 결정방식과 위원회 상정방식.

경제기획원 예산실은 거의 매일 국.과장들이 모여 예산심의를 한다. 종합
적인 의견을 들어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명분에 불과하다. 속내는
예산배정에 따른 개별 책임을 면키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더 우세하다.

"새정부 출범 이전까지만 해도 이처럼 심의가 잦지는 않았다" (예산실
P과장)는 말이 이를 반증한다.

위원회 상정방식도 원래 목적은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위원회가 결정한 것이라..."며 책임을 돌리기
위한 방편으로 운용되기 일쑤다.

하기야 이런 회의제나 위원회운영은 "변하긴 해야겠는데..."는 시대요청
의 산물이긴 하다.

문민정부 들어 중요정책결정을 앞두고 공청회등 여론수렴행사가 부쩍
자주 열리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바람직한 현상이다.

제도의 오용이 문제일 뿐이다.

물론 면피성 행정에 대한 관료들의 변명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잇단
규제완화조치로 권한은 별로 주어지는게 없이 책임추궁만 당하는 일이
늘어나니 어쩌겠는가"(국세청 K과장)

"권한과 책임은 행정업무수행과정의 두 수레바퀴다.

권한없는 책임은 면피주의를 낳고 책임없는 권한은 행정독주만을 불러
일으킬 뿐"이라는 미행정학자 프레드릭슨교수의 진단도 과천관료들이
자주 인용하는 금언이다.

그러나 지금 요구되는 것은 행정독주도 아니고, 면피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그에 대한 해법은 결국 관료들 스스로가 찾을 수밖에.

기업들처럼 업무고과에 가점.감점주의를 도입해 관료들의 일하려는 의욕
을 북돋워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권한"이 아니라 "소신"에 의해 관료들이 일할 맛을 찾게끔
여건을 만들어주는 일도 시급하다.

요즘 청와대가 서둘러 마련하고있다는 "공직사회 분위기쇄신대책"는
관료들에게 이런 소신과 용기를 북돋워주는데서 시작돼야 한다는게
"과천"의 주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