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과 권위의 대명사처럼 불려온 재무부 이재국이 45년만에 무대에서
사라지게 됐다. 경제계를 쥐고 흔들수 있는 "생사여활권"을 쥐고 있는
이재국이 영욕의 반세기에 막을 내리는 것이다.

흔히 "모피아"(재무부의 영학명칭인 MOF에 마피아를 합친말)로 불리는
재무부의 막강한 힘은 거개가 바로 이재국에서 나왔다.

가장 막강한 무기가 "돈". 항상 모자르기 마련인 돈을 거머쥐고 통치권자
의 지근거리에서 칼질을 했었다.

72년의 "83조치"처럼 돈줄의 흐름을 바꾸어놓는 정책도 이곳에서 성안이
됐다. 과거엔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보험과 증권까지 이재국에서 요리
했다.

금융산업육성이라는 명목으로 인사권의 물론 경영내용까지 일일이 이재국
의 "윤허"를 받아야 했다. 이러니 금융기관이라는게 재무부의 돈을 맡아
두는 금고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도 이재국에서 골격이 정해졌다. 실제로 3공 이래
의 부실기업정리와 지난 90년의 5.8조치도 이재국에서 다듬어 졌다.

매크로하게는 경제운용계획의 골간인 금리와 통화가 이재국에서 결정됐다.
어지간히 대가센 부총리가 아니곤 이재국이 안된다고 우기는 데는 배겨나질
못한다. 힘없는 부총리의 "권위"보다 힘있는 이재국 사무관의 "파워"가
세다는건 알만한 사람은 다안다.

이재국장의 입지가 이러하니 아무나 그자리에 않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장래에 장차관이 될만한 재목을 가려서 앉힌다. 실제로 32명의 역대
이재국장(모두 33대이나 김원기씨가 두번 역임)중 15명이 장차관으로
입신했다. 장관에 오른 인물이 10명. 김유택 초대이재국장은 초대
경제기획원장과 초대부총리를 포함해 경제팀장을 네번이나 역임했고 김원기
씨도 부총리에 올랐다. 송인상 김정 김용환 장덕진 박봉환 이용만 정영의
강현욱 전장관이 모두 이재국장 출신이다.

장차관이 못돼도 차관보급(1급)은 따논 당상이다. 아주 잘못 풀릴때 가는
곳이 금융기관이나 감독기관장 또는 금융관련 협회장이었을 정도다.

자리에 앉아서는 막강하고 물러나도 잘 풀리는 곳이니 바람 잘 날이 없게
마련이다. 외부의 시선이 고울턱이 없고 더러는 "싹쓸이"를 당하기도
했다.

비근한 예가 지난 80년7월.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재국이
대학살을 당했다. 이른바 숙정이다. 이재국의 과장 4명(금융정책과와
이제 1~3과장)중 3명이 옷을 벗었고 1명이 (이재1과장)만이 목숨을
건졌으나 그나마 한직으로 밀려났다.

1년반 뒤인 82년2월엔 경제기획원에게 점령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김재익 당시 경제수석의 진언에 의해서 였다. 권한이 집중된 이재국을
재무부 사람에게 맡겨선 "개혁"이 안된다며 경제기획원 사람으로 물갈이를
했다. 차관엔 강경식(당기 기획원차관보),이재국장엔 이 구씨(당시
기획원정책조정국장)가 점령군으로 진주했다. 이재국장이던 이수휴씨는
재무협력관이라는 할일 없는 자리는 그러고도 강현욱씨로 이어지며 기획원
사람에게 바톤이 넘겨졌다.

가깝게는 5공시절의 부실기업정리에 따른 책임도 이재국이 져야만 했다.
부실기업 정리문제로 다친 사람이 아직은 없지만 유동 당시 뒷처리를
담당했던 실무국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6년여의 "외유"를 해야만 했다.

우리나라의 근대경제사 반세기와 궤를 같이한 이재국은 이제 역사로만
남게 됐다. 더이상 "모피아"로 놔두지 않는 도도한 변화의 물결이
이재국의 간판을 내려 버렸다. 권한과 담당분야가 찢어지고 이름조차
없어진 이재국. 옷과 명함만 달라진 것이 아닌 환골탈태이기를 기대해
본다.

<정만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