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사회에서 선비의 도락은 대부분 수신과 연관된 것이었다.

도교 불교와 달리 "여기 이땅에서" 이상향을 찾아야했던 유자들은
사사건건 사람과 세상사에 부딪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시조나 가사 그리고 그것에 가락을 붙인 노래는 선비들의 대표적
취미였다. 그 노래는 신분의 천대를 감수하며 살아야했던 민중들의 걸쭉한
소리와 질적으로 차이나는 것이었다. 내용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안분자족의 검소한 선비정신을 강조하거나 관조의 세계를 즐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분사회의 소산으로 양반의 노래,왕실의 노래는
정가(가곡.만년장환지곡)라 불렸고 민중의 노래,백성의 노래는 속가라
불렸다.

이동규씨(49.국립국악원원로단원)는 5대째 정가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가객이다. 이씨는 우리 국악계를 통틀어 보기드문 국악명문의 후손이다.

고조부(이인식)는 헌종때 궁중아악부 가전악 고종때 전악을,증조부
(이원근)는 고종때 아악부 악수장을 지낸 정악계의 거봉이었다. 조부
(이수경)는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장을 지낸 거문고의 명인. 예술원회원
성경린선생의 스승이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자주 악기를 만드셨지요. 예닐곱살 무렵부터 명주실
꼬는 것을 도운 기억이 납니다" 거문고명인 할아버지에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는 칭송을 들었던 가곡명창 아버지(이병성)
의 아들로 이씨는 어렸을때부터 국악명문가후손이란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집안의 전폭적 지원으로 58년 홍은국교졸업후 국악사양성소(국악고교
전신)에 입학한 그는 한동안 가곡과는 딴 길을 걷고 만다.

"신입생환영연주회때 가야금에 반하고 말았지요. 12현에다 운지법이
다채로워 배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도전하고 싶더라구요" 그는
가야금뿐만 아니라 편종 편금 소금 대금 적등 악기에 심취했고 처용무도
배웠다.

이씨가 경주이씨의 가업을 잇게 된것은 국악사양성소 3학년때부터이다.
8년간 심장병을 앓아오던 부친이 작고하자 주위에서 아버지의 노래를
이어받으라는 권고와 "생전에 배울것이지"라는 질책이 함께 쏟아졌다.
5남2녀의 장남으로서 그에게 막중한 책임이 밀려오던 때였다.

"당시 국악원장으로 계시던 이주환선생이 손을 잡아주셨어요. 아버지의
후배이자 제자였던 이선생에게 가곡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따로 아버지의 녹음을 들으며 공부에 애쓴 결과 30대이후
그는 전성기의 아버지 목소리를 그대로 닮았다는 평을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호 두봉에 빗대 그의 호를 주위에서 우봉으로 지어준 것도
그때다.

76년 예능보유자전수발표회 성악부문우수상을 수상하고 82년 이동규가곡
발표회를 열었다. 83.86년 두차례 KBS국악대상 가곡부문 본상을 수상했고
87년엔 중요무형문화재 제30회 남창가곡 보유자 후보지정을 받았다.

"이선생은 가곡을 "쓴약"에 비유하셨죠. 속가는 사탕이라고 하셨어요.
즉시로 입에 단것을 먹겠느냐,두고두고 몸에 좋은 약을 먹겠느냐가 늘
선생께서 하시던 질문이었죠"

가곡은 선비의 노래인 만큼 그 자세가 중요하다. 일단 노래를 부르기 시작
하면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파리가 귀찮게 해도 인상을 찡그릴 수 없다.
보통 한곡에 6분30초정도 걸리는데 그 사이 아무 움직임도 없이 노래만
불러야한다. 그가 82년 가진 가곡독창회는 2시간공연이었다. 가곡으로서는
초유의 기록이었다. 몇해전 공연을 관람한 부인이 "그 어려운 일을 왜
하느냐"며 핀잔을 주더라고.

"가곡은 남창가곡 26곡과 여창가곡 15곡이 있습니다. 그걸 묶어 정가라고
부르죠. 요사이엔 너무 편향되는 것 같아요. 남자는 남창만,여자는 여창만
하려고 해요"

장구 세피리 대금 해금 거문고 가야금 단소 양금의 반주에 맞춰 첫곡
"초수대엽"부터 끝곡 "태평가"까지 미동도 없이 불러내는 이씨의 모습은
거대한 산을 연상시킨다. 그가 우조로 "동차 아아앙이 아이이이"라고
노래를 시작하면 관객은 절로 숙연해진다.

이씨는 국악의해에 무엇보다 침체된 장르가 다시 일어설수 있는 계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곡분야의 합창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만나는 국악인마다에게 전하는 소망이다. 지방의 국악관현악단등
전국의 어느 단체에나 가객은 많아야 서너명뿐이다. 대학교수를 빼고 각
단체에서 활동하는 가곡전공자들은 전국적으로도 수십명에 불과하다.

"국악원에도 서너명의 가객이 있지요. 젊은 사람들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내가 은퇴하면 모를까. 가곡합창단을 만들어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예전부터 국가가 장려하던 노래를 이제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은 문제이지요"

부인 박영이씨(43)와의 사이에 1남1녀. 토목공학과(명지대)를 다니다
방위병근무중인 큰아들 종호(21)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고
국악고에서 가곡을 전공했던 딸 현숙(19)도 연극을 전공하겠다며 서울예전
연극영화과에 올해 입학했다. 이씨는 "언젠가는 나처럼 가곡을 잊지 못하고
돌아오겠죠"라며 웃는다.

<권녕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