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5개년계획작성은 69년부터 시작하여 71년7월에 마쳤지만 70년에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68년3월 경제기획국장이 되고 72년1월
기획관리실장으로 승진될때까지 4년동안의 반이상을 3차5개년계획작성에
보냈다.

이때 계획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종합기획과의 이웅수과장,투자1과의
김태승과장(조달청장역임),투자2과의 조성낙과장(투자심의국장역임),
자금계획과의 이진설과장(건설부장관역임),경제조사과의 강신조과장
(현 민자당국회의원)등 이었고 김만제 백영훈박사등도 작업을 도왔다.

3차5개년계획작성시에는 아델만교수나 바라사교수등이 개별적으로
도왔으나 2차계획때와같이 외국의 자문단은 없었고 국내교수와 연구기관을
많이 활용했다.

69년6월 김학열부총리가 부임했는데 3차계획작업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김부총리는 차관때 2차계획,부총리때 3차계획을 작성했다.
따라서 말한대로 그가 2차계획의 아버지요 3차계획의 할아버지라고
할수있다. 그러나 3차계획에서는 2차계획에서와같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거나 모든 작업과정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대신 장예준차관이 그역할을 했으나 김부총리만큼 적극적으로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장차관은 "잡초"라는 별명답게 끈질기게 일을 추진했다.
장기영부총리가 김학열차관을 업무에 별로 개입시키지 않았던것과
마찬가지로 김학열부총리시절에는 장예준차관이 다소 소외되어 있었다.
두부총리의 강한 개성과 특유한 성격이 차관의 역할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것같다.

3차계획에서 총량모형이나 부문모형등은 2차계획때의 것을 현실에 맞게
조정사용했으며 그동안의 경험을 토대로 전체작업과정과 내용을 사전에
일정표로 작성,그 일정에 따라 작업을 진행했다.

우리경제는 그동안 1,2차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이나 농업개발및 공업화의 기반이 구축됐으며 급속한 수출증대로
경제가 양적인 면에서 크게 성장했다. 이같이 양적으로는 급속한 성장을
달성했으나 질적인 면에서 지역간 계층간 격차가 벌어지고 경제의 안정도
상당히 흔들렸던게 사실이다.

이러한 여건의 변화를 감안하여 3차계획에서는 그 기본정신을 첫째로
"성장 안정 균형의 조화"에 맞췄다. 안정된 기반위에서 성장을 이룩하고
동시에 개발성과가 농어민과 저소득층을 포함하여 온 국민에게 널리 보급돼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데 중점을 뒀다.

둘째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국제수지개선및 주곡의 자급을 실현함으로써
"자립적 경제구조"를 이룩하며 셋째 4대강유역개발과 도로망의 대폭적인
확충등 국토의 종합적인 개발을 보다 촉진하여 "지역개발의 균형"을
기한다는 기본정신을 토대로 했다.

또 1,2차계획이 사업프로젝트에 많은 비중을 두었던것과는 달리
3차계획에서는 개별투자사업보다 시장기능을 중시해 유인책을 통한 정책에
중점을 두는,말하자면 보다 간접적이며 예시적인 성격이 강하게 부각됐다.

성장률 목표 설정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총량모형에 의해 도출된 성장
가능수치는 높은쪽이 12%이고 낮은 쪽이 10%로 였다. 당시 실무진에서는
낮은 쪽인 10%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세계은행은 2차계획때 성장목표가 너무 의욕적이라고 비판을 했으나
3차계획에서는 오히려 우리가 너무 낮게 목표를 설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김부총리의 의견은 전혀 달랐다. 그는 계획은 낮게잡고 실적을 높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8%내외가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많은 토의 끝에 부총리의
의견에 따라 기간중 연평균 8.6%의 성장률 목표를 책정했다. 계획을
집행한 결과 실적은 당초 실무진에서 주장했던 수준인 10.1%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