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히 상중에 있는 몸으로 노묘에 있다가 갑자기 벼슬을 내리시는
명을 듣고 황송하고 놀라와 옷깃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오니,
나아가고 물러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임금께서 명하시고 아비가
꾸짖으니 신의 한몸이 집과 나라에 둘다 용납할 바가 없는 까닭에 병을
무릅쓰고 겨우 길에 올라 죽음을 잊고 진정하옵니다"
세종19년(1437)4월20일 이순지(?~1465)가 임금에게 올린 글에는 상중에
관직을 받아 충과 효의 갈림길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한 선비의
안타까운 심정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천문관측의 총책임을 맡았던 봉상판관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향리로 내려가자 세종은 그를 대신할만한 인물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작위와 녹봉을 높인뒤 상중이었지만 다시 임명(기복)할수 밖에
없었다.

"신이 태어날때부터 병이 많아 다섯살때까지도 말을 못하고 먹지
못하여 항상 포대기에 뉘였었는데 어미가 고생스럽게 품에 안고
업으시며 유모에게 맡기지 아니하였고 몸소 젖을 먹여 길러서 지금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감동적이라할만큼 애절하게 써내려간
이순지는 시묘를 그만두고 관직에 차마 다시 나아갈수 없는 속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어머니가 생전에 늘 자신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여러
아들중에서 오직 너만 몸소 젖을 먹여 길렀으니 내가 죽으면 네가 즐겨
나의 무덤에 시묘하겠느냐"고 하시면서 친척들에게도 "내 무덤에 시묘할
아이는 반드시 이 아이"라고 말씀하셨다고 지난일을 회상했다.

그때 자신은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하여 이런 말을 내십니까. 백수를
하신뒤에 만일 불행함이 있으면 감히 명을 좇지 아니하오리까"라고
대답했노라고 한 그는 모자간의 언약이 이러했으니 겨우 세달밖에 안되어
시묘를 그만둔다면 신이라는 것이 어디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임금에게
관직을 거두어 주기를 간청하고 있다.

어머니가 살아계실때는 그 말을 허락하고 돌아가셨다고 그 언약을
배반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는 것을 그는 임금에게 고백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고 있다.

"상중에 있으면서 슬픔을 잊고 영화를 탐해 은총을 입으면 위로는
인륜교화에 죄를 얻고 아래로는 풍속을 길이 더럽힐 것이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내리신 벼슬을 도로 거두시고 상을 마치도록해 끝없는 슬픔을
조금이라도 펴게 하옵소서"
그러나 세종이 이순지같은 드문 인재를 3년동안이나 썩혀두지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요즘은 주지않아 못하는 것이 벼슬이요,자리하나 비면 파리떼 몰려들듯
지망생이 많은 것이 관직이지만 예전에는 죽은 어머니에게 효도하기위해
굴러들어온 관직도 마다한 예가 있었다는 것을 이순지의 경우를 보면 잘
알수있다.

그러나 예전이라고 해서 이순지같은 효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역시
세종때의 인물로 중국어에 능해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김하는
대도호부사로 있으면서 아비의 상중에 관기를 첩으로 들여 앉히고
아들까지 낳아 "동방 억만세의 강상을 무너뜨렸다"는 탄핵을 받았다.
또 중종조의 재상이었던 유진은 첩을 얻어들이고 늙은 어머니를 내쫓아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무렵 비인에 사는 춘비라는 여종(관비)에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먹여 죽어가는 아비를 소생시킨 효행으로 정문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태조때부터 숙종때까지
3백여년동안 1천94명의 효자(효녀)가 나라의 표창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박주저 "조선시대의정표정책")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집계일뿐 실제로는 이 숫자보다 훨씬 더많은 효자들이 방방곡곡에서
사회 순화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순하여 조금도 어버이의 뜻에 거슬리는 바가
없었다. 모친의 고질병환에 3년묵은 쑥을 구해서 뜸질로 낫게 하였고
노쇠하여 보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업고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경물을 보게했다. 우애 또한 유별하였으니 아우 두분과 더불어 밤낮으로
한방에 거처하며 따스한 옷과 앉을 자리를 서로 사양하고 별미가 있으면
손수 먹여주어 늙어서도 마치 어린아이를 거두듯하였다. 어느해 겨울
아우와 함께 여행중에 배(주)를 탔는데 공이 옷끈을 끄르고 아우를 끌어
안아 아우가 형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기를 어린아이 같이 하니 보는
이가 모두 감탄하였다"
한말 령남 유종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 사미헌 장복추(1815~1900)의
문집을 읽어내려 가다보면 향수처럼 밀려오는 진실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을 결속시켜주는 힘을
부모와 자식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육친의 사랑(부자자효)에서부터
되살려내야 옳다는 생각도 해본다. 효는 참된 인간실현의
근본(위인지본)이기 때문이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