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역대 임금들은 천재지변을 무엇보다 두려워 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것이 천재지변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변이
일어나는 것이 임금의 잘못때문이라고 믿었다. 임금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정사를 바르게 펴나가면 천지의 화기가 감응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원망과 한탄을 불러일으켜 천지의 감응이 어그러진다고 믿었던것이
옛사람들 사고의 기본 패턴이었다.

여름날씨가 여름답지 않게 서늘하면 괴변으로 여겼다. 한겨울에 복사꽃이
피는 것도 불길한 조짐으로 생각했다.

이런 이변이 생길때마다 임금은 불안하게 마련이었다. 궁궐에서 부엉이만
울어도 임금의 가슴은 덜컥내려 앉았다.

특히 흉년이 들면 임금은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근신을 해야했다. 스스로
반성하면서 구언을 청했다. 가무를 중단하고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였다(감선철악). 점심에는 물에 만 밥만 먹었다.

중종은 즉위초부터 하늘이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아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어 내야했다. 보위에 오르면서부터 6년동안 흉년이 계속됐다.

봄부터 가을까지 비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중종7년(1512). 그해에는

동틀무렵이면 으레 시야에서 사라져야할 샛별이 대낮에도 보인 날이 셀수
없이 많았다. 청주와 대구에서는 지진이 일어났다. 어느날 초저녁에는
북쪽 하늘에 불처럼 붉은 기운이 나타났다. 흙비가 내리기도 했다.

여주윗지역 한강상류의 물이 붉은 빛으로 물들어 흘러내렸고 서울의
한강물은 검은 빛을 띠었다. 벼락이 종묘동산 소나무를 치고 제물로
쓰려건 소가 사당안에 들어가 죽었다. 또 어느날 밤에는 개처럼 보이는
짐승이 궁궐담을 넘어 달아났다.

오늘날 같으면 사소한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이런 사실들을 빼놓지않고
기록해 놓은 사신들의 속뜻을 지금 헤아릴수는 없지만 재변이 잇달아
기록될때는 그만큼 당시의 사회가 어지러웠다는 것을 "왕조실록"의
기록들은 입증해 주고 있다.

훈구대신들과의 정권투쟁에서 혁신세력인 사림이 어느정도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중종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겹치지 않을수 없었다. 6년이
지나도록 연산조의 병폐는 가시지 않았다. "유신지치"를 내세운
혁명세력의 옹립을 받은 중종도 당초에 마음먹었던대로 정사를 펴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훈구대신과 사림들의 암투는 심했다.

하룻밤만 지나면 어명이 바뀌고 제도가 달라졌다. 관직의 임명도 일정한
기준이 없었고 권세 잡은 천거자에 따라 좌우됐다.

"하찮은 몸으로 조종의 대업을 이어받아 황천 대하기를 봄얼음 밟듯이
조심했으나 재변이 그치지 않고 하늘의 꾸짖음이 계속된다. 아,경사와
백성과 리거(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사람)는 나의 과실을 말하여 나의
부족함을 도우라"
심상치않은 재변이 잇달아 일어나자 중종은 이렇게 구언하는 전지를
내렸다.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귀양갔다가 반정후 재기용된 대사헌 이자건이
상소를 올렸다.

사람부터 정해놓고 관직을 나누어주는 정실 인사,형평의 원칙을 벗어난
형벌제도,일관성없는 법령의 제정,폐쇄된 언로등 임금의 실책을 낱낱이
들춰내 공박한 그는 "어찌 때가되면 곪은 곳이 터지지 않겠느냐"고
다그쳤다. 또 조정의 실정을 "마치 판자를 아교로 붙여 배를 만들고 썩은
새끼줄로 밧줄을 만들어 허수아비를 시켜 배를 부리게 하는 격"이라고
풍자하면서 임금을 "허수아비"로 몰아쳤다.

"그린 용은 비가 오게 할수 없고 그림의 떡은 요기할수 없는 것"이라고
겉치레만하고 실지가 없는,시작은 있으되 결과가없는 조정의 정책을
비꼬기도한 그는 천재를 하늘이 임금을 사랑하여 반성하는 기회로 받아들여
폐정을 개혁하는 계기로 삼을것을 임금에게 진언하고 있다.

중종은 이자건의 상소를 읽은뒤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위 아래사람들의 과실을 갖추어 진술함이 지금의 병폐에 맞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기노라"

"왕조실록"에 실린 천재지변기사들은 사회의 모순과 비리에 대해 사관이
울리는 일종의 경종이었던 셈이다. 예컨대 단종의 "노산군일기"말미에
가면 거의 매일 그의 억울한 죽음을 예고하듯 다음과 같은 기록이 숨가쁘게
이어지고 있다.

"경북궁 근정전에서 부엉이가 울었다"

<부국장대우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