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본격적인 사정작업이 석달 넘게 진행되면서 `정
치자금''이 사정수사의 새로운 성역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이에 따라 검찰 안팎에서는 정치자금을 수사성역으로 그대로 인정할 경
우 검찰로서는 정작 국민의 공분을 살 정경유착사건 등에 대해 인지수사
를 꺼리는 구태를 벗지 못하게 됨은 물론 김영삼 정부 사정작업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비자금 조성 및 정치자금의 행방을 놓고 여론의 관심을 모아온 박태준
전 포철명예회장의 수뢰사건을 수사해온 대검 중수부는 17일 "박씨가 별
도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든가 정치자금을 뿌렸다는 단서가 발견되지 않았
다"면서 박씨의 수뢰혐의만 밝힌 채 사실상 수사를 종결했다.

또 5공 때부터 권력과 유착해 각종 특혜를 받아오면서 권력의 정치자금
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한양그룹 배종렬 회장을 수사중
인 서울지검 공안2부도 "배씨의 비자금 조성부분은 수사대상이 아니다"
라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검찰은 이런 조처에 대해 비자금이나 정치자금을 수사할 특별한 증거나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검찰 내부에서는 정치자금 문제는 이미 오랫동안 굳어져온 관행
이기 때문에 제도개선이 급선무이며 수사에 나설 경우 다른 부작용이 크
다는 논리가 지배적으로 자리잡고 있어 이런 기류가 정치자금 수사기피의
큰 원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검찰내 상당수 관계자는 현행 정치자금법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이어서
법대로 정치자금을 마련해 정치비용을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한 데다 실제
로 여.야를 막론하고 탈법적인 정치자금 수수를 일삼아왔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제도개선으로 해결해야지 사법처리가 능사가 아니라는 논리를 펴
고 있다.

또 검찰이 정치자금에 손을 댈 경우 정치보복이니 정치권 물갈이니 하
는 비난이 항상 잇따르고 국민이 정치권을 불신하게 되는 풍조를 조장할
수도 있어 정치자금 수사는 현재로서 검찰권의 남용으로 비칠 소지도 있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상당부분 형식적인 수사를 포장하기 위한 것이며
실제로는 권력이 불편해하는 부분을 피해가려 하는 소극적이고 타성적인
검찰관의 반영이라는 지적이 검찰 안에서도 많다.

음성적인 거액의 정치자금 수수에는 반대급부가 따를 수밖에 없으며 이
는 필연적으로 민주사회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정경유착의 근본을 이룰
수밖에 없는데도 검찰이 이에 대한 사정을 기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치자금을 성역화할 경우 정치인이라는 명분만 갖고 있으
면 아무리 큰 도둑이라도 다 빠져나가게 돼 사법적 형평이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특수부에 근무하는 한 검찰관계자는 "오간 돈에 직무관련성이나 대가
성이 입증되면 정치자금법뿐 아니라 변호사법에도 위반된다"면서 "수사
도 해보기 전에 정치자금이라고 미리 비켜간다면 검찰의 존재가치가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여.야 모두 부패했다고 해서
손을 못 댄다면 사정수사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라며 "정경유착 고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끊어야 할 것이며 지금이라도 검찰 수뇌부의 결단만 있
으면 정치자금 관련 수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