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이상을 예술의 과정에 비유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독일제국의 철혈재상이었던 비스마르크도 "정치는 힘에 알맞게 행하는
예술"이라고 한적이 있다. 정치권력이 도를 넘어서지 않고 공동선을 위해
행사될때 정치가 예술과 같은 경지에 이를수 있음을 말한 것일 것이다.
정치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예술의 과정처럼 행해질수 있다면 플라토가
일찍이 바라마지 않던 철인통치국가로 가는 도정이 될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예술행위는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무한히 많은
가능성들 가운데서 어떤것을 선택하여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음곡을 보자. 서로 다른 음의 선율과 강약,장단과 고저가 선택적으로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어 가락이 되고 그것이 하나의 악곡으로 탄생된다.
무용의 연속동작 또한 리듬의 강약,빠르고 느림,크고 작음,가볍고 무거움의
대비로써 표현된다. 조각의 경우도 단단한 재료에 선택적 입체형식을
형상화시켜 간다.

이것들 모두가 아름다움의 창조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선택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정치지도자는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공동선"이라는 아름다움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 책무다. 위정자들은 복잡하고 다양하기 그지없는 정치적
경제적 환경이나 사회적 사상과 맞닥뜨려 국가라는 공동체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선택과정을 거친다. 거기에서 요구되는 것이 최선의
정치적 결단이다. 그것이 정치의 기조를 비롯한 정책 제도 행정행위로
구체화된다. 그런 점에서 정치는 "개성화"를 추구하는 예술행위보다 훨씬
차원이 높은 "사회조형예술"이라 할수 있다. 그러나 그 최종목표에 이르는
과정은 마찬가지다.

김영삼대통령이 "신한국 창조"의 기치를 내걸고 새 정부를 출범시킨뒤
100여일동안에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추진시켜온 개혁은
정치예술의 바탕을 다지기 위한 선행작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과거 30여년에 걸쳐 군사적 강권통치가 산적시켜 놓은 구조적 부정부패와
비리를 발본색원함으로써 경제에 활력을 주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현정권의 의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만이
정치예술과정을 복원시킬수 있는 지름길이 될수있기 때문이다.

지난 강권통치의 과정을 살펴보면 과정보다는 결과,내실보다는
현시,장기적 비전보다는 단기적 업적을 중시한 나머지 수단의 정당성이
전혀 도외시되어 왔음을 알수있다. 그러한 어두운 그늘아래서 권력층을
비롯한 지도계층 재계 학원의 파행적 행태들이 그 뿌리를 깊숙이 내려왔다.
그간의 사정으로 드러난 권력형 부정부패의 연이은 행렬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부정부패나 비리의 추방은 어느시대 어떤 여건에서도 지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는 이의가 있을수 없다.
그러나 대내외적으로 변전이 극심한 현실은 복잡다양한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키면서 대응을 요구해오고 있다. 장기적 비전을 담은 "공동선
추구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것이 그 처방일수 있다.

정부가 입안중인 "신경제5개년계획"이나 홍보용 책자인 "신한국창조의
길"등의 내용,정부 각부처의 정책이나 시책등의 편린적 발표만으로
신한국이 나아갈 실체를 국민들에게 완전히 납득시키고 공감을 얻을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도 미진한 부문들이 많다.

사정일변도의 정국조성이 한국사회의 발전을 정체시키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소리를 표명하고 있는 일부의 비판에도 귀를 기울일때가 왔다는
점을 정부는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소수의 비판이나 시각에도
배려를 보내주는것이 자유의회민주정치의 기본정신이지 않은가. 여론의
허구속에서 소수가 묵살되는 사회에는 또다른 새로운 부정적 요소들이
싹틀수도 있다.

문민시대를 되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모진 고통과 희생을 치러왔는가를
되돌아 보면서 예술가가 영구불변의 창작품을 일구어 나가듯이 신한국을
다듬어 가는 정성어린 무구한 정치예술의 손길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