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은행 외화자금부의 김종성과장. 그는 지난 2월하순 어느날
다른날보다 1시간30분이나 빠른 오전7시에 은행에 도착했다. 엔화의
급등(강세)을 막기위해 일본중앙은행(BOJ)이 개입에 나설것이라는
소문때문이었다. 밤사이 외신은 BOJ의 개입이 확실시된다는 소식을
쏟아내놓고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전9시 동경외환시장이 개장되자마자
"팔자"매물이 쏟아져나왔다. 로이터 텔레라이드등 외환단말기는 온통
팔자주뿐 사자는 없었다. 달러당 1백20엔대에 머물던 엔화환율은
1시간만에 1백21엔대로 치솟았다. 순식간에 엔화는 약세로 돌아선것이다.
"이제 팔아야할 때입니다. 더 이상 갖고있으면 손해만 늘어 납니다"
그렇지않아도 흔들리던 김씨마음을 같이 일하는 대리는 휘저어놓았다.
가지고있는 돈은 2억엔. "지금 팔아야하나,아니면 다시 엔값이 오를때를
기다려 기회를 엿봐야하나"김씨는 결정 할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흘렀다. 엔화환율은 치솟기만했다. "아니야 기다려.
미국등이 가만있지 않을거야"김씨는 결국 자신의 판단을 믿기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1시간이 마치 한달로 느껴졌다. 그동안 외환시장은
일본BOJ와 세계각국은행들의 대결일뿐 다른 변수는 없었다. 이윽고
"엔화의 강세는 좀더 계속돼야한다"는 미국각료의 발언이 나왔다.
그것으로 모든것이 끝이었다. 1시간도 못돼 엔화는 달러당 1백19엔대로
치솟았다. 김씨가 이긴 것이다.

이런식으로 김씨가 1주일에 매매하는 돈은 대략 1억달러정도(약8백억원).
한달에 4억달러정도(3천2백억원)를 그는 합법적인 "판돈"으로 굴리고있다.
1%만 손해를 내도 32억원이 왔다갔다한다. 이익을 내면 그반대인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외환거래도 "제로섬"게임이기는 노름판과 마찬가지다.
따는 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자연 보이지않는
"버티기"가 계속되고 때론 무모할 정도의 "베팅"도 이뤄진다.

광주은행 전외환딜러였던 조마노씨는 지난 89년까지 국내의 손꼽히는
"펀드매니저"였다. 그는 선물환거래를 통해 88년 한햇동안 무려 33억원의
이익을 냈었다. 그해 광주은행의 당기순이익은 38억원에 불과했다. 조씨
혼자 은행이익의 86.8%를 벌어들인 셈이다. 가히 다른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딜러만이 할수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잘나가던 조씨도 89년에 순간의 판단착오로 딜러 생명의 종말을
맞았다. 환율예측을 잘못해 결국 조씨는 4월중순까지 3백47억원의 손해를
내고 말았다. 은행의 10년간 이익을 1백일만에 까먹은 꼴이었다. 조씨의
부침은 외환딜러의 화려함과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한은행 국제부 이재균씨. 그는 아직 딜러라는 호칭이 어울리지않는
햇병아리딜러이다. 그는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국제금리나 환율변화등을 도표로 만들때가 많다는 얘기다. 장차 국제적인
외환딜러로 우뚝서기 위해서는 국제적 조류를 읽는 시각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을 이씨는 짧은 경험을 통해 안다.

지난91년 한 시중은행에서 신입행원 1백여명을 대상으로 원하는 부서를
조사한적이 있었다. 정확히 83명이 국제부를 원했다. 그것도 외환딜러는
꼭해보고 싶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이같이 딜러는 은행원이면 누구나
선망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전문딜러는 2백여명밖에
없다.

딜러들의 생활은 겉보기처럼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1백만달러가
1백달러로 보인다. 각종 정보등에 관해 혼자 중얼거릴때가 많아진다.
꿈에서도 단말기가 나타나고 외환거래를 한다. 이런 증상이 잦아지는
딜러라야 믿을만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일에 치여 사는 사람이 많다.

특히 국내은행들은 아직 딜러를 전문직으로 "양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능력이야 어쨌든 대리는 돼야 자기가 책임지고 거래할수있는 한도가
주어진다. 좀 할만하면 영업점에 나가야하는 경우도 태반이다.
20세전후부터 전문딜러를 기르는 외국은행하고는 다르다. 금융시장개방과
원화의 국제화를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도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라는
지적이 많다.

<하영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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