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을 강타했던 실명역사소설류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장편소설의 침체는 순문학이 출판가의 주도권을 잡을 호기를 또
다시 놓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최근 거친 문체로 체험담을
늘어놓는 아마추어작가의 신변잡기가 버젓이 소설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어줍잖은 연애론,젊은 선원의
항해기,월남파병용사의 참전기 등이 "장편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양산되고
있다.
이러한 아마추어작가의 체험담류 장편물들은 신생출판사를 통해 수십종이
출간돼있고 연애시집 역사소설에 이어 새로운 출판형태로 자리를 잡아갈
조짐이다.

현재 서점가에 나와있는 기존작가의 신작장편은 하일지씨의 "경마장에서
생긴일",채영주씨의 "시간속의 도적",안정효씨의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등
손에 꼽을 정도이다. 하재봉씨의 "블루스 하우스",박상우씨의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공지영씨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등 연초에 나왔던
작품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해 한켠에 밀려 전시되고 있다.

특히 중견문인들의 경우는 신문연재물을 묶어내거나 수십년전 작품을
개작,재출간하고 있어 90년대적 삶에 관한 언급을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재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는 박경리씨의 "김약국의 딸들"은 62년작을
재출간한 것이고 김원일씨의 "늘 푸른 소나무",홍성원씨의"먼동"등
대하소설과 최인호씨의 "길 없는 길",이문열씨의 "오디세이아 서울"등은
일간지에 연재됐던 작품을 다시 묶은 것이다.

이청준씨의 "서편제"와 신경숙씨의 "풍금이 있던 자리",신인작가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김소진씨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등은 기발표된
중.단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작년 한해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위
신세대작가들도 별다른 문학적 결정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장편소설의 침체를 자율적인 시장원리에 의한 조절로 보는 시각도 있다.
작품위주가 아닌 작가위주로 이루어진 "전작계약출판"이 별 재미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들의 이러한 침묵은 90년대식 사회독법을 이들이 아직
마련하지 못한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급속한 변화를 겪고 있는
사회변화의 큰 줄기를 아직 읽어내지 못하고 있고 표현해야할 역사의식
사회의식의 90년대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장편을 쓰려는 지망생들은 계속 늘고 있다. 올들어 "작가세계상"
응모에는 27편의 장편이 투고됐고 "오늘의 작가상"에는 45편의 장편이
응모했다.

이는 예년의 2~3배 수준이다. 기존작가가 침묵할 경우 사회변화를 적극
수용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세대교체도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권영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