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전략군단사] (122)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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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을 펴나가는 것은 물론 행정력에 의하게 된다.
행정력이란 "행정에 관한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그 의사를 표시 집행하는
권한"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행정명령도 내릴수 있다. 행정기관이 직권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꼭
법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지도도 있다. "행정기관이 그
직무의 범위내에서 그 행정의 대상이 되는 개인법인 단체등에 대하여
의도하는 행정목적이 이루어지도록 비권력적인 수단으로 지도하는일"이다.
경제총수도 이러한 행정력으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자리에 부임했는데도 사람에 따라 행정력에 큰 차이가
난다.
우선 능력과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행정권위도 힘 에 좌우
권위를 가진 사람이 행정권위자이다. (198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권위주의적 행정가는 사전에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위를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행정가"로 나와있다.
일종의 권력주의자이다.
행정권위자와는 딴 종류의 사람이다. 사계의 권위자라면 그 분야에
남다른 지식과 실견을 가진 사람으로서 모두가 흠모하는 대상인 것이다.
공무원은 모두 행정권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행정력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공무원 세계에서는 이
힘은 주로 직속상관으로부터 부여되기 일쑤이다.
가령 A라는 국장이 있다고 치자. A국장이 장관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면 A국장에게는 그만큼 힘이 생겨 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총책임지는 경제총수는 대통령의 신임 여하에 따라서 힘이
세질 수도 있고,약해질 수도 있다. 시간의 변수도 있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가 나중에는 약해질 수도 있다. 신임도가 줄어들면
그 자리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이 공무원의 세계이다. 그러니
고급공무원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으려고 분투노력을 한다.
그런데 장관이라면 최고의 직위인데도 대통령의 일정이 바쁘기 때문에
수시로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다.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행해지지 않았다.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아니고는 하기 힘든 일이다(통화로 보고하는 몇몇 장관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서 대통령 비서실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입장이니 용건이 있을
때는 수시로 보고가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과 경제총수와의
사이에는 한다리 걸치게 되는 일이 생겨나기 일쑤이다. 그래서 "의명
비서실장"이라는 지시가 하달되기 쉽다. 단적으로 말해 의명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지 않는 부총리와 받는 부총리가 있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비서실장이 정치통이면 정치의 영향을 받고 경제통이면 경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이 된다.
<>이승만대통령 시절이나 장면국무총리 시절에는 경제개발계획은
시안정도만 나왔고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경제문제는 각 부처에서 작성된
각 프로젝트마다 서류로 결재를 맡음으로써 추진되어 갔다. 프로젝트마다
대통령(또는 국무총리)은 장관임명으로 경제문제를 책임지게 했고
장관경질을 통해 문책하였다. 경제총수라고 할만한 기관이나 사람은
없었다.
<>군사혁명직후에는 경제기획원장관이 경제총수였다.
그러나 타 부처를 총괄할수는 없었다. 모두다 장관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내각수반을 문책하기도 했다.
필자는 1차5개년계획 초기 화학과장 시절에 송요찬수반에게 직접 브리핑을
한 예가 몇번 있었다. 각 장관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청와대 경제비서관은 대통령의 보좌만 했다.
<>64년 5월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은 부총리를 겸했다. 강력한
경제시책을 펴기 위해서는 부총리라는 직위가 필요하다고해서 새로 생겨난
직제였다. 경제문제는 장부총리가 책임졌다. 경제 각 부처(장관)를 완전
장악했다.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국무총리(정일권)에게 거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부총리는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청와대
경제비서관은 아직 대통령 보좌만 했다. 이때 상공부는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는 수출확대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상공부에서 마련한 수출정책은
한달에 한번씩 개최되는 이 수출확대회의에서 모든 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수출정책 만큼은 상공부는 대통령의 직접지시를 받게되는 격이
되었다. 수출확대회의는 박충훈장관 시절에 창설되어 김정 장관시절로
이어져 갔다.
새벽2시에 걸려온 전화
장부총리는 경제동향보고라는 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한달에
한번씩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경제동향보고회의는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계속되어
점심식사까지 함께하게 되니 충분한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이때가
장부총리로서는 행정권위자로서 실력을 발휘할 귀중한 기회가 됐던 것이다.
한가지 예만 든다.
당시 상공부의 연료과장이었던 한재열씨(기협중앙회부회장역임. 현
한경시스템회장)의 증언이다. 66년이면 월동준비로 난리를 피울 때였다.
겨울을 어떻게 무사히 넘기느냐가 정부의 큰 골칫거리일 때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연료의 원활한 공급이었다. 서민층에 대한 19공탄 공급이
최대 이슈였다. 하루는 밤2시에 한재열씨 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장부총리의 전화였다. 장부총리는 밤중에도 잠을 안자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력은 놀랄만했다. 전화내용은 "한과장,내일 경제동향
보고회의에 참석하도록해! 연료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하고 나와"하는
것이었다. 한과장은 밤잠을 설치고 동이 트기도 전에 상공부에 나와서
서류를 정리하고,숫자를 암기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경제기획원 담당자가 경제동향을 브리핑하고 나자 장부총리가 앞으로
나왔다. "각하,지금부터 월동준비 상황에 대해서 상공부 연료과장과
일문일답을 하겠습니다"하고 서두를 꺼냈다.
그리고는 "한과장!이번 달에 서울시에서는 연탄 몇개를 생산했어"하자
한과장은 "<>백 만개입니다"했다.
장부총리는 "청량리에 무연탄 화차가 몇대 도착했어""부산과 인천항에는
몇t 이 도착했어""인천에 있는 저유탱크에는 며칠분의 기름재고가
있어""흥국상사에서 건설하고 있는 저유탱크는 언제 완성되며 지금 몇%가
진척됐지"하고는 "각하!올 겨울은 무연탄만 가지고는 안심이 되지않아
석유난로를 긴급 수입해서 서민들에게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관세를
면제해서 싸게 공급해야 서민층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한과장! 석유난로가
몇개 발주되었지,언제까지 도착하지"이런식으로 질문이 계속되었다.
한과장은 장부총리의 질문에 물흐르듯 술술 답변을 했다. 그랬더니
장부총리는 "각하! 이상 끝입니다. 금년도 월동준비는 완비되었습니다.
금년 겨울은 이상없이 넘길수 있겠습니다"했다.
박대통령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런 광경을 본 장부총리는
즉시 "각하! 지금까지 고생한 직원을 소개합니다. 상공부 연료과장
한재열과 물가과장 권용진입니다"하고는 두사람을 일어서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치하해 주었다. 당시는 전화가 귀할 때라 과장집에 전화를
놓는것이 힘들 때였다. 한재열씨 이야기로는 집전화를 가설해준 것이
장부총리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정이건 새벽2시건,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한수위였다. 며칠 지나
박충훈상공부장관이 한재열과장을 부르더니 차에 타라고 하고는 인천으로
곧바로달렸다. 인천의 흥국상사 탱크 건설현장에 도착해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검은색 차 한대가 왔는데 내리는 사람을 보니 박대통령이었다.
경호차도 없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이 현장확인을 하러온 것이었다.
서민층의 월동준비가 걱정이됐던 것이다. 한과장이 현장에서 월동준비에
대해 소상히 브리핑을 했다. 이를 듣고 박대통령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박장관은 한과장을 보고 "대단하구만. 잘했어"하고 칭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장부총리가 불러서 가니 "수고했어"하며 책상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주었다. 자세히 보니 설탕 밀가루 구두표등 교환권이
약50~60장 되더라고 한다. 한과장은 수고한 직원과 관계관(철도청 등)들과
나누어 썼다고 한다.
<>67년10월에 부임한 후임 박충훈부총리도 장부총리와 같은 맥락이었다.
박충훈부총리는 장기영부총리가 궤도를 이탈한 부분을 바로 잡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래서 "안정과 성장의 조화"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안정이 위주였던 시기이다. 교과서적 행정,유리창 행정을
모토로 했다. 야생마도 타지를 않았다. 그러니 야생마는 딴 사람이 타게
되었고 뒤치다꺼리만 해야 했다. 의명 비서실장이 날아오니
국무총리(정일권)에게 자주 보고를 하고 상의할수 밖에 없었다.
오랜 실무경험 밑바탕
박부총리는 좀 때가 좋지 않을때 부총리직을 맡아 일했다고 볼수있다.
딴사람이 저지른 일을 바로잡는데는 고생만 따르고 업적이 눈에 띄지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러한 일은 누군가가 해야했다. 박부총리가
적임자였고 공도 컸다. 박부총리 회고록을 보면 부총리 시절의 애로사항을
엿보게하는 대목이 있다. 회고록에는 "약관 29세의 초대 무역국장으로
화려한 출발을 했던게 꼭 40년전 일이다.
그후 동란과 더불어 10년간의 공군복무를 마친 나는 5.16전날 전역과 동시
상공부 사무차관으로 발을 들여놔 두차례 상공부장관을 지냈고 다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후 7년동안
무역협회회장등 약10년간 민간부문에서 활동을 계속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국무총리란 중책을 맡게됐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통령권한대행을 끝으로
관계에서 물러났다.
돌이켜보면 공직에 몸담고 있었던게 30년이다.
그동안 가장 보람있었던 때를 말하라고하면 서슴지않고 상공부 시절을
꼽겠다. 무역국장 상공국장 나아가 사무차관때도 그랬지만 어느정도
내포부를 펼수 있었던 것은 역시 상공부장관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박정희대통령의 신임과 뒷받침 덕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장 보람있었던 때가 상공부장관 시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신임과 뒷받침 덕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박부총리는
오랫동안 화려한 공직생활을 했다.
공군복무시절에는 국방부 경리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상역 공업 재정등
경제전반에 걸친 실무경험을 많이 했다. 그래서 각종 경제계수도 몸에
배어있었다. 식견이 높으며 경제감각도 뛰어났다. 더욱이
영어실력,그것도 회담형 영어 연설형 영어는 가위일류급이었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고 유머가 있었다.
그래서 외국의 일급명사와 곧 친숙해졌다
행정력이란 "행정에 관한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고 그 의사를 표시 집행하는
권한"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행정명령도 내릴수 있다. 행정기관이 직권으로 내리는 명령이다. 꼭
법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행정지도도 있다. "행정기관이 그
직무의 범위내에서 그 행정의 대상이 되는 개인법인 단체등에 대하여
의도하는 행정목적이 이루어지도록 비권력적인 수단으로 지도하는일"이다.
경제총수도 이러한 행정력으로 경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똑같은 자리에 부임했는데도 사람에 따라 행정력에 큰 차이가
난다.
우선 능력과 행정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행정권위도 힘 에 좌우
권위를 가진 사람이 행정권위자이다. (1980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권위주의적 행정가는 사전에는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위를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행정가"로 나와있다.
일종의 권력주의자이다.
행정권위자와는 딴 종류의 사람이다. 사계의 권위자라면 그 분야에
남다른 지식과 실견을 가진 사람으로서 모두가 흠모하는 대상인 것이다.
공무원은 모두 행정권위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이다)
행정력에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공무원 세계에서는 이
힘은 주로 직속상관으로부터 부여되기 일쑤이다.
가령 A라는 국장이 있다고 치자. A국장이 장관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다면 A국장에게는 그만큼 힘이 생겨 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총책임지는 경제총수는 대통령의 신임 여하에 따라서 힘이
세질 수도 있고,약해질 수도 있다. 시간의 변수도 있다. 처음에는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가 나중에는 약해질 수도 있다. 신임도가 줄어들면
그 자리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것이 공무원의 세계이다. 그러니
고급공무원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으려고 분투노력을 한다.
그런데 장관이라면 최고의 직위인데도 대통령의 일정이 바쁘기 때문에
수시로 대통령을 만날 수는 없다.
문명의 이기인 전화로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잘 행해지지 않았다. 대통령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람이 아니고는 하기 힘든 일이다(통화로 보고하는 몇몇 장관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서 대통령 비서실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입장이니 용건이 있을
때는 수시로 보고가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과 경제총수와의
사이에는 한다리 걸치게 되는 일이 생겨나기 일쑤이다. 그래서 "의명
비서실장"이라는 지시가 하달되기 쉽다. 단적으로 말해 의명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지 않는 부총리와 받는 부총리가 있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비서실장이 정치통이면 정치의 영향을 받고 경제통이면 경제의
영향을 받는다는 결론이 된다.
<>이승만대통령 시절이나 장면국무총리 시절에는 경제개발계획은
시안정도만 나왔고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경제문제는 각 부처에서 작성된
각 프로젝트마다 서류로 결재를 맡음으로써 추진되어 갔다. 프로젝트마다
대통령(또는 국무총리)은 장관임명으로 경제문제를 책임지게 했고
장관경질을 통해 문책하였다. 경제총수라고 할만한 기관이나 사람은
없었다.
<>군사혁명직후에는 경제기획원장관이 경제총수였다.
그러나 타 부처를 총괄할수는 없었다. 모두다 장관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대통령은 내각수반을 문책하기도 했다.
필자는 1차5개년계획 초기 화학과장 시절에 송요찬수반에게 직접 브리핑을
한 예가 몇번 있었다. 각 장관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청와대 경제비서관은 대통령의 보좌만 했다.
<>64년 5월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은 부총리를 겸했다. 강력한
경제시책을 펴기 위해서는 부총리라는 직위가 필요하다고해서 새로 생겨난
직제였다. 경제문제는 장부총리가 책임졌다. 경제 각 부처(장관)를 완전
장악했다.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국무총리(정일권)에게 거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부총리는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청와대
경제비서관은 아직 대통령 보좌만 했다. 이때 상공부는 대통령이 직접
주관하는 수출확대회의를 주관하고 있었다. 상공부에서 마련한 수출정책은
한달에 한번씩 개최되는 이 수출확대회의에서 모든 문제가 결정되었다.
그래서 수출정책 만큼은 상공부는 대통령의 직접지시를 받게되는 격이
되었다. 수출확대회의는 박충훈장관 시절에 창설되어 김정 장관시절로
이어져 갔다.
새벽2시에 걸려온 전화
장부총리는 경제동향보고라는 회의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한달에
한번씩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경제동향보고회의는 아침 10시에 시작해서 정오까지 계속되어
점심식사까지 함께하게 되니 충분한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이때가
장부총리로서는 행정권위자로서 실력을 발휘할 귀중한 기회가 됐던 것이다.
한가지 예만 든다.
당시 상공부의 연료과장이었던 한재열씨(기협중앙회부회장역임. 현
한경시스템회장)의 증언이다. 66년이면 월동준비로 난리를 피울 때였다.
겨울을 어떻게 무사히 넘기느냐가 정부의 큰 골칫거리일 때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연료의 원활한 공급이었다. 서민층에 대한 19공탄 공급이
최대 이슈였다. 하루는 밤2시에 한재열씨 집에 전화가 걸려 왔다.
장부총리의 전화였다. 장부총리는 밤중에도 잠을 안자고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정력은 놀랄만했다. 전화내용은 "한과장,내일 경제동향
보고회의에 참석하도록해! 연료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하고 나와"하는
것이었다. 한과장은 밤잠을 설치고 동이 트기도 전에 상공부에 나와서
서류를 정리하고,숫자를 암기했다. 그리고 회의에 참석했다.
경제기획원 담당자가 경제동향을 브리핑하고 나자 장부총리가 앞으로
나왔다. "각하,지금부터 월동준비 상황에 대해서 상공부 연료과장과
일문일답을 하겠습니다"하고 서두를 꺼냈다.
그리고는 "한과장!이번 달에 서울시에서는 연탄 몇개를 생산했어"하자
한과장은 "<>백 만개입니다"했다.
장부총리는 "청량리에 무연탄 화차가 몇대 도착했어""부산과 인천항에는
몇t 이 도착했어""인천에 있는 저유탱크에는 며칠분의 기름재고가
있어""흥국상사에서 건설하고 있는 저유탱크는 언제 완성되며 지금 몇%가
진척됐지"하고는 "각하!올 겨울은 무연탄만 가지고는 안심이 되지않아
석유난로를 긴급 수입해서 서민들에게 공급하기로 했습니다. 관세를
면제해서 싸게 공급해야 서민층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한과장! 석유난로가
몇개 발주되었지,언제까지 도착하지"이런식으로 질문이 계속되었다.
한과장은 장부총리의 질문에 물흐르듯 술술 답변을 했다. 그랬더니
장부총리는 "각하! 이상 끝입니다. 금년도 월동준비는 완비되었습니다.
금년 겨울은 이상없이 넘길수 있겠습니다"했다.
박대통령은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이런 광경을 본 장부총리는
즉시 "각하! 지금까지 고생한 직원을 소개합니다. 상공부 연료과장
한재열과 물가과장 권용진입니다"하고는 두사람을 일어서라고 했다.
박대통령은 치하해 주었다. 당시는 전화가 귀할 때라 과장집에 전화를
놓는것이 힘들 때였다. 한재열씨 이야기로는 집전화를 가설해준 것이
장부총리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정이건 새벽2시건,시도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박대통령은 한수위였다. 며칠 지나
박충훈상공부장관이 한재열과장을 부르더니 차에 타라고 하고는 인천으로
곧바로달렸다. 인천의 흥국상사 탱크 건설현장에 도착해서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검은색 차 한대가 왔는데 내리는 사람을 보니 박대통령이었다.
경호차도 없었다고 한다. 박대통령이 현장확인을 하러온 것이었다.
서민층의 월동준비가 걱정이됐던 것이다. 한과장이 현장에서 월동준비에
대해 소상히 브리핑을 했다. 이를 듣고 박대통령은 안심하고 돌아갔다.
박장관은 한과장을 보고 "대단하구만. 잘했어"하고 칭찬을 해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장부총리가 불러서 가니 "수고했어"하며 책상서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주었다. 자세히 보니 설탕 밀가루 구두표등 교환권이
약50~60장 되더라고 한다. 한과장은 수고한 직원과 관계관(철도청 등)들과
나누어 썼다고 한다.
<>67년10월에 부임한 후임 박충훈부총리도 장부총리와 같은 맥락이었다.
박충훈부총리는 장기영부총리가 궤도를 이탈한 부분을 바로 잡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그래서 "안정과 성장의 조화"라는 정책을
내세웠다. 안정이 위주였던 시기이다. 교과서적 행정,유리창 행정을
모토로 했다. 야생마도 타지를 않았다. 그러니 야생마는 딴 사람이 타게
되었고 뒤치다꺼리만 해야 했다. 의명 비서실장이 날아오니
국무총리(정일권)에게 자주 보고를 하고 상의할수 밖에 없었다.
오랜 실무경험 밑바탕
박부총리는 좀 때가 좋지 않을때 부총리직을 맡아 일했다고 볼수있다.
딴사람이 저지른 일을 바로잡는데는 고생만 따르고 업적이 눈에 띄지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러한 일은 누군가가 해야했다. 박부총리가
적임자였고 공도 컸다. 박부총리 회고록을 보면 부총리 시절의 애로사항을
엿보게하는 대목이 있다. 회고록에는 "약관 29세의 초대 무역국장으로
화려한 출발을 했던게 꼭 40년전 일이다.
그후 동란과 더불어 10년간의 공군복무를 마친 나는 5.16전날 전역과 동시
상공부 사무차관으로 발을 들여놔 두차례 상공부장관을 지냈고 다시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후 7년동안
무역협회회장등 약10년간 민간부문에서 활동을 계속하다 생각지도 않았던
국무총리란 중책을 맡게됐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통령권한대행을 끝으로
관계에서 물러났다.
돌이켜보면 공직에 몸담고 있었던게 30년이다.
그동안 가장 보람있었던 때를 말하라고하면 서슴지않고 상공부 시절을
꼽겠다. 무역국장 상공국장 나아가 사무차관때도 그랬지만 어느정도
내포부를 펼수 있었던 것은 역시 상공부장관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박정희대통령의 신임과 뒷받침 덕이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가장 보람있었던 때가 상공부장관 시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박대통령의 신임과 뒷받침 덕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박부총리는
오랫동안 화려한 공직생활을 했다.
공군복무시절에는 국방부 경리국장으로 일했다. 그리고 상역 공업 재정등
경제전반에 걸친 실무경험을 많이 했다. 그래서 각종 경제계수도 몸에
배어있었다. 식견이 높으며 경제감각도 뛰어났다. 더욱이
영어실력,그것도 회담형 영어 연설형 영어는 가위일류급이었다. 논리가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고 유머가 있었다.
그래서 외국의 일급명사와 곧 친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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