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차례로 광주에
내려가 현황을 보고받고 진압작전을 논의했다는 증언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또 당시 신군부의 핵심멤버였던 정호용 공수특전사령관도 격려차 현지를
잠시 방문했고 현지에 투입한 3개 공수여단에 대해 작전권을 행사하지 않았
다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위 청문회 증언''과는 달리 이기간중
대부분을 광주에 머무르며 진압작전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이같은 주장은 당시 전남북지역의 계엄업무를 관장했던 전투병과 교육사령
부의 작전참모 백남이씨(62,당시 대령)이 14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제기됐다.
백씨의 이런 주장은 88년 청문회에서 전, 노사령관의 광주방문사실을 부인
한 정호용 소준열씨등의 증언과 보안사령관으로서 서울에서 현지상황만을
보고받았을 뿐이라는 전 전대통령의 진술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백씨는 이날 회견에서"7,11공수여단의 도청앞 집단발포 다음날인 5월22일
오전 전사령관이 헬기편으로 광주비행장에 도착, 전교사사령부에서 장형태
전남도지사 소준열 전교사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광주 505보안부대장 이
재우대령등과 1시간여동안 요담한뒤 서울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또 노 수경사령관은 27일의 최종진압작전이 개시되기 2-3일전쯤 오전 역시
헬기편으로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사령부에서 소사령관 공수여단장등과 사태
수습등에 관해 1시간30여분동안 논의했다고 백씨는 말했다.
백씨는 "당시 상황실 근무중 노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온 것은 직접 목격했
으며 전사령관에 대해서는 상부로부터 군용통신전화를 통해 광주비행장에
도착한다는 것을 통보받았고 이어 전교사사령부로 출발했다는 보고를 받았
으나 이들이 주재한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전교사의 핵심참모였으나 이름을 밝히길 거부한 홍아무개씨(63)도 "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두사령관이 극비리에 광주에 내려왔었다는 사실을 이
들이 상경한뒤 뒤늦게 보고를 받았다"고 증언, 백씨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백씨는 진압부대로 내려온 공수부대가 상급배속부대인 전교사의 통제를 전
혀 받지 않았고 일체의 보고도 없이 전교사와는 별도의 상황실을 전교사기
밀실에 설치하고 거의 상주한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휘를 받았다고 덧붙였
다. 백씨는 "당시 윤흥정 전교사사령관의 무혈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공수
부대의 과잉진압이 계속됐다"며 "공수여단장들은 윤사령관의 이같은 온건진
압 방침에 불만을 나타내 이같은 배경에서 윤장군이 소준열 사령관으로 교
체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백씨는 또 24일 송암동에서 공수부대와 보병학교병력간의 오인 사격사건직
후 장세동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가 권총을 차고 자신을 찾아와 "왜 우리에
게 협조않느냐.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했다고 말했다.

한편 전, 노대통령측은 백씨등의 이런 주장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전 전대통령의 민정기 비서관은 백씨의 주장에 대해 "광주청문회때 다 나
온 얘기로 터무니 없는 것이다. 헬기타고 내려갔다면 목격자와 관련자가 수
십명 될텐데 지금가지 숨겨질 수 있겠느냐"고 백씨의 주장을 일축했다.
노대통령의 비서관인 윤석천씨도 "당시 수경사령관이 자리를 비우고 갈 상
황이 아니다. 수경사엔 헬기장이 없어 헬기가 뜨려면 물을 뿌리고 연병장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지휘관이동이 비밀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