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업 이사람> 이병서 한국특수화학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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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특수화학(대표 이병서)은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페인트업체.
종업원 90여명에 작년 매출이 1백50억원인 전형적인 중소업체이다. 대형
페인트업체들의 연간 외형 1천억~2천억원과 겨루면 비교도 안되는 규모다.
하지만 페인트업계에서 이 회사를 무시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상당수
업체들이 이 회사의 뛰어난 기술력과 한발짝 앞서가는 경영능력을 두려워할
정도다.
한국특수화학은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특수한 페인트만 만들고 있다.
캔인쇄용과 활주로및 도로용 페인트,미사일용페인트,내열방화도료등이
그것이다. 이들 페인트는 그동안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았거나 외국업체의
국내법인에 의해 겨우 생산되던 품목들이다.
한국특수화학은 지난68년 창업후 25년동안 남들이 안하는 분야를
개척,3건의 발명특허를 따낸것을 포함해 10여종의 페인트를 국산화했다.
이들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이 대부분이다.
예를들어 미사일용 페인트는 녹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초고속으로
날아가는동안 표면에서 발생하는 열(섭씨 약1천도)을 견뎌야 한다.
뿐만아니라 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게 전자파를 차폐하는 기능도 한다.
첨단도료라고 할수 있다.
캔인쇄용도료 역시 마찬가지다. 주력 생산품목인 이 제품은 도료를 전혀
흡수하지 않는 주석판이나 알루미늄판위에 칠하는만큼 견뢰도가 뛰어나야
하고 금방 건조돼야 한다. 또 색상도 고와야 한다.
한국특수화학을 설립한 이병서사장(56)은 창업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사업역정을 걸어왔다.
서울대상대 졸업후 61년 한국나이롱(코오롱의 전신)에 들어간 그는 당시
이동찬전무(현코오롱그룹회장)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엘리트사원으로
승승장구했다. 특히 영업능력이 탁월해 매출신장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회사내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지만 입사8년만인 31세때 영업부장을
끝으로 사직하고 한국특수화학을 창업했다.
한국나이롱에서의 근무를 통해 석유화학의 유망성에 매력을 느꼈고 이
분야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동찬씨는 그를 어찌나
총애했던지 퇴사를 극구 만류했고 그는 퇴사조건으로 친동생을
한국나이롱에 데려다 놓고서야 겨우 빠져나올수 있었다.
퇴직금 3백만원으로 서울 중곡동 벌판에 조그마한 공장을 차렸다. 직원은
7명. 하지만 그는 대규모석유화학공장을 경영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고 자신만만했다.
첫 생산품은 건축용도료등 일반제품이었다. 대리점을 통해 위탁판매했다.
그러나 품질이 나빠 반품되기 일쑤였고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가는 대리점도
비일비재했다.
창업후 1년만에 빚이 2천만원으로 불어났다.
사업은 직장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유망한 직장인에서 1년새
빚독촉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고생을 모르며 곱게 자란 아내에게 돈을 꿔
오라고 사정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한때 여의치않아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넘긴 그는 사업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일반제품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남들이 생산하지 않는 제품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때마침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됐으나 도로용페인트는 국산화가 안돼 전량
일본에서 들여다 썼다. 1년에 한번씩 차선도색작업을 하는 것도 수입품을
쓸수 밖에 없었다. 이에 착안,1년동안의 고생끝에 70년에 도로용페인트를
개발해냈다. 과학기술연구소등을 뒤져 관련문헌을 입수하고 학자나
기술자의 자문을 얻어 가까스로 생산하게 됐다. 도로용페인트는
바르자마자 차가 다녀야 되기때문에 빨리 말라야하고 밤에 빛이 반사돼야
하는등 고급기술이 필요했다. 도로공사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70년대 중반엔 국내업계 최초로 도료기술선진국인 미국에 페인트완제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하와이 주정부에 3백만달러어치의 도로용페인트를
내보냈다.
또 미국에서 전량 사다 쓰던 군용페인트를 국산화,74년부터 납품도
시작했다. 군납은 급성장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고속성장을 시기한
경쟁업체들의 모함과 투서로 한달동안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생을 하기도
했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난 그는 사업에 환멸을 느껴 몇번씩이나 사업을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후 10여년간 외형 30억~50억원규모로 조용히
사업을 하면서 인천지역 서민들을 위해 가좌동에 아파트를 지어
지역복지사업에 힘을 쏟기도했다. 1백77가구분의 임대아파트를 지어
가구당 월세 5만원에 입주시켰다.
90년에 남동공단공장준공을 계기로 그동안의 정체에서 벗어나 재도약에
나서고 있다. 시설비만 1백여억원이 투입된 이 공장은 캔인쇄도료와
금속인쇄 자동화라인을 갖추고 있다. 이사장은 종업원과
지역사회,동료기업인들로부터 모범중소기업인이라는 평을 듣는게 꿈이다.
<김락훈기자>
종업원 90여명에 작년 매출이 1백50억원인 전형적인 중소업체이다. 대형
페인트업체들의 연간 외형 1천억~2천억원과 겨루면 비교도 안되는 규모다.
하지만 페인트업계에서 이 회사를 무시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상당수
업체들이 이 회사의 뛰어난 기술력과 한발짝 앞서가는 경영능력을 두려워할
정도다.
한국특수화학은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특수한 페인트만 만들고 있다.
캔인쇄용과 활주로및 도로용 페인트,미사일용페인트,내열방화도료등이
그것이다. 이들 페인트는 그동안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았거나 외국업체의
국내법인에 의해 겨우 생산되던 품목들이다.
한국특수화학은 지난68년 창업후 25년동안 남들이 안하는 분야를
개척,3건의 발명특허를 따낸것을 포함해 10여종의 페인트를 국산화했다.
이들은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이 대부분이다.
예를들어 미사일용 페인트는 녹을 방지하는 것은 물론 초고속으로
날아가는동안 표면에서 발생하는 열(섭씨 약1천도)을 견뎌야 한다.
뿐만아니라 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게 전자파를 차폐하는 기능도 한다.
첨단도료라고 할수 있다.
캔인쇄용도료 역시 마찬가지다. 주력 생산품목인 이 제품은 도료를 전혀
흡수하지 않는 주석판이나 알루미늄판위에 칠하는만큼 견뢰도가 뛰어나야
하고 금방 건조돼야 한다. 또 색상도 고와야 한다.
한국특수화학을 설립한 이병서사장(56)은 창업후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사업역정을 걸어왔다.
서울대상대 졸업후 61년 한국나이롱(코오롱의 전신)에 들어간 그는 당시
이동찬전무(현코오롱그룹회장)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엘리트사원으로
승승장구했다. 특히 영업능력이 탁월해 매출신장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회사내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였지만 입사8년만인 31세때 영업부장을
끝으로 사직하고 한국특수화학을 창업했다.
한국나이롱에서의 근무를 통해 석유화학의 유망성에 매력을 느꼈고 이
분야에서 인생의 승부를 걸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동찬씨는 그를 어찌나
총애했던지 퇴사를 극구 만류했고 그는 퇴사조건으로 친동생을
한국나이롱에 데려다 놓고서야 겨우 빠져나올수 있었다.
퇴직금 3백만원으로 서울 중곡동 벌판에 조그마한 공장을 차렸다. 직원은
7명. 하지만 그는 대규모석유화학공장을 경영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고 자신만만했다.
첫 생산품은 건축용도료등 일반제품이었다. 대리점을 통해 위탁판매했다.
그러나 품질이 나빠 반품되기 일쑤였고 돈을 떼어 먹고 도망가는 대리점도
비일비재했다.
창업후 1년만에 빚이 2천만원으로 불어났다.
사업은 직장생활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유망한 직장인에서 1년새
빚독촉에 쫓기는 몸이 되었다. 고생을 모르며 곱게 자란 아내에게 돈을 꿔
오라고 사정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한때 여의치않아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아내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넘긴 그는 사업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일반제품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남들이 생산하지 않는 제품개발에
나서기로 했다.
때마침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됐으나 도로용페인트는 국산화가 안돼 전량
일본에서 들여다 썼다. 1년에 한번씩 차선도색작업을 하는 것도 수입품을
쓸수 밖에 없었다. 이에 착안,1년동안의 고생끝에 70년에 도로용페인트를
개발해냈다. 과학기술연구소등을 뒤져 관련문헌을 입수하고 학자나
기술자의 자문을 얻어 가까스로 생산하게 됐다. 도로용페인트는
바르자마자 차가 다녀야 되기때문에 빨리 말라야하고 밤에 빛이 반사돼야
하는등 고급기술이 필요했다. 도로공사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70년대 중반엔 국내업계 최초로 도료기술선진국인 미국에 페인트완제품을
수출하기도 했다. 하와이 주정부에 3백만달러어치의 도로용페인트를
내보냈다.
또 미국에서 전량 사다 쓰던 군용페인트를 국산화,74년부터 납품도
시작했다. 군납은 급성장의 계기를 만들었으나 고속성장을 시기한
경쟁업체들의 모함과 투서로 한달동안 수사기관에 끌려가 고생을 하기도
했다. 결국 무혐의로 풀려난 그는 사업에 환멸을 느껴 몇번씩이나 사업을
포기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후 10여년간 외형 30억~50억원규모로 조용히
사업을 하면서 인천지역 서민들을 위해 가좌동에 아파트를 지어
지역복지사업에 힘을 쏟기도했다. 1백77가구분의 임대아파트를 지어
가구당 월세 5만원에 입주시켰다.
90년에 남동공단공장준공을 계기로 그동안의 정체에서 벗어나 재도약에
나서고 있다. 시설비만 1백여억원이 투입된 이 공장은 캔인쇄도료와
금속인쇄 자동화라인을 갖추고 있다. 이사장은 종업원과
지역사회,동료기업인들로부터 모범중소기업인이라는 평을 듣는게 꿈이다.
<김락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