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부품 가공용머시닝센터 .. 동양방전 이치성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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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전 이치성사장(46)의 사업시작은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무로 칼을
다듬는 경이를 목격한 뒤였다"고 한다.
이사장이 말하는 무는 방전가공기이고 칼이란 각종 정밀부품,전기의 힘을
빌려 자신보다 강한 것을 가공하는 것이 방전기. 이사장은 무로 칼을
자르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어릴적부터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때의 일이다.
그는 서울 마포고를 졸업하고 10여년동안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건자재를 만드는 P사에서 외주관리를 맡았는데 이때 방전기를 처음 본
것이다. 물론 국산은 아니었다. 70년대중반이었는데도 국산기계가 없었던
때였다. 그는 단지 "신기하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았다. 이 기계를
국산화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77년 서울 구로동에 동양방전이란 기업을 세웠다. 79년에 1호기가
개발됐다. 품질상 이사장을 만족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수입가격의
10분1선으로 공급했다. 가격대비 품질은 그런대로 수요업계의 인정을
받을만했다.
동양방전의 출발은 이랬다. 이사장의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열악한
기계공업의 텃밭을 옥토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회사성장과 궤를 같이해
성장했다.
지금은 방전기는 물론 와이어커팅기 각종 소형머시닝센터도 함께 만들고
있다.
지난해에는 63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1백억원을 목표로 순항하고있다.
창업당시 이사장을 포함,2명의 식구로 출발한 이회사는 85년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대지 1천7백평규모의 번듯한 공장을 마련했고 현재는 종업원도
80여명으로 늘었다.
지난 89년 2천만원대의 CNC방전기를 국산화했고 지난해에는 머시닝센터의
일종인 태핑센터를 국산화했다.
이사장의 꿈인 기계류국산화를 속속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외제선호의 풍토에서 일개 중소기업인 동양방전의 성장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업계에서는 기계류 국산화를 위해 한우물을 파온 것과 이사장의 독특한
마케팅전략을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동양방전은 설립이후 정밀기계생산만 고집해왔다. "좋아하는 일"이라서
앞만 본것이다. 이익에 관계없이 꿈사냥에 몰두했다. 사업초창기에
정밀기계류의 수요자인식은 냉소적이었다. 굳이 비싼 기계를 사용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그이유다. 당시에는 인력난도 없었다. 이사장은
"자전거를 타던 사람에게 오토바이를 세일하려니 그럴만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오토바이를 타면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비용절감이
된다는 설명으로 밀어붙였다. 여기서 포기하면 사업이 망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장래도 어두울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장은 수요자를 교육시켰다. 설득은 상대가 설득대상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동차부품가공용 머시닝센터를
개발,보급에 나설때도 그는 "교육"을 해야했다.
이회사는 지난해 9월 서울 구로동에 동양방전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지난 87년부터 사설연구소로 운영하던 것을 법인으로 전환한 것이다.
기계의 하드웨어부문은 어느정도 궤도에 올랐으나 소프트웨어부문이
약하다는 자체진단끝에 이분야의 연구를 위해 설립했다. 중소기계업체로선
획기적인 선택인 셈이다.
동양방전의 세일즈방식은 독특하다. 설립초기부터 대구 부산 서울에
영업소를 두고 지방판매를 전담케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서울영업소에
있는 테크니컬센터. 테크니컬센터에서는 연간 1백여명의 수강생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두달동안 무료로 동양방전에서 생산하는 각기종의
기계를 교육시킨다. 그리고 이들제품판매와 함께 테크니컬센터수료자들의
취직을 알선해 준다. 자사제품을 훤히 알고 있는 이들 수료생들 덕택에
AS걱정은 따로없다. 기계도 팔고 AS부담도 줄인다. 일석이조다.
동양방전이 순탄하게만 성장 해온 것은 아니다. 이사장은 이 대목에서
일본을 안떠올릴수 없다고 한다. 기술은 일본쪽에 몰려있어 일본을
뚫어야만 했다.
그는 자동차부품용 머시닝센터를 개발하고 싶었다. 이때가 87년이다.
관련잡지에서 일본브라더사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으로
날아갔다. 브라더사의 말단 담당자가 약속도 안하고 찾아왔느냐고
문전박대를 하려했다. 예의가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래서 이사장은 "난
세일즈맨이다. 오지말라고 했어도 왔을 것"이라며 외국손님에게 이럴수
있느냐고 거꾸로 예의론을 들고 나왔다. 훔치러온 것이 아니고 단지
보러왔다고도 졸랐다.
기술후진국 기업체의 사장으로 서럽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결국 브라더사와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했다.
이사장은 일본에 자사제품을 수출하고 싶어한다. 일본진출은 곧 세계시장
진출의 서막이 될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동양방전은 지난 5월 러시아공화국에 CNC방전가공기와 CNC와이어커터를
각각 1대씩 수출했다. 처녀수출이다.
이사장은 이를 계기로 세계시장진출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남궁덕기자>
다듬는 경이를 목격한 뒤였다"고 한다.
이사장이 말하는 무는 방전가공기이고 칼이란 각종 정밀부품,전기의 힘을
빌려 자신보다 강한 것을 가공하는 것이 방전기. 이사장은 무로 칼을
자르는 꼴이라고 생각했다.
어릴적부터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는 충격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때의 일이다.
그는 서울 마포고를 졸업하고 10여년동안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건자재를 만드는 P사에서 외주관리를 맡았는데 이때 방전기를 처음 본
것이다. 물론 국산은 아니었다. 70년대중반이었는데도 국산기계가 없었던
때였다. 그는 단지 "신기하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았다. 이 기계를
국산화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77년 서울 구로동에 동양방전이란 기업을 세웠다. 79년에 1호기가
개발됐다. 품질상 이사장을 만족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수입가격의
10분1선으로 공급했다. 가격대비 품질은 그런대로 수요업계의 인정을
받을만했다.
동양방전의 출발은 이랬다. 이사장의 호기심에서 출발해서 열악한
기계공업의 텃밭을 옥토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회사성장과 궤를 같이해
성장했다.
지금은 방전기는 물론 와이어커팅기 각종 소형머시닝센터도 함께 만들고
있다.
지난해에는 63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 1백억원을 목표로 순항하고있다.
창업당시 이사장을 포함,2명의 식구로 출발한 이회사는 85년 인천시 북구
효성동에 대지 1천7백평규모의 번듯한 공장을 마련했고 현재는 종업원도
80여명으로 늘었다.
지난 89년 2천만원대의 CNC방전기를 국산화했고 지난해에는 머시닝센터의
일종인 태핑센터를 국산화했다.
이사장의 꿈인 기계류국산화를 속속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외제선호의 풍토에서 일개 중소기업인 동양방전의 성장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업계에서는 기계류 국산화를 위해 한우물을 파온 것과 이사장의 독특한
마케팅전략을 성공의 열쇠라고 말하고 있다.
동양방전은 설립이후 정밀기계생산만 고집해왔다. "좋아하는 일"이라서
앞만 본것이다. 이익에 관계없이 꿈사냥에 몰두했다. 사업초창기에
정밀기계류의 수요자인식은 냉소적이었다. 굳이 비싼 기계를 사용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 그이유다. 당시에는 인력난도 없었다. 이사장은
"자전거를 타던 사람에게 오토바이를 세일하려니 그럴만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오토바이를 타면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비용절감이
된다는 설명으로 밀어붙였다. 여기서 포기하면 사업이 망하는 것도
문제지만 우리나라 기계공업의 장래도 어두울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장은 수요자를 교육시켰다. 설득은 상대가 설득대상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동차부품가공용 머시닝센터를
개발,보급에 나설때도 그는 "교육"을 해야했다.
이회사는 지난해 9월 서울 구로동에 동양방전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지난 87년부터 사설연구소로 운영하던 것을 법인으로 전환한 것이다.
기계의 하드웨어부문은 어느정도 궤도에 올랐으나 소프트웨어부문이
약하다는 자체진단끝에 이분야의 연구를 위해 설립했다. 중소기계업체로선
획기적인 선택인 셈이다.
동양방전의 세일즈방식은 독특하다. 설립초기부터 대구 부산 서울에
영업소를 두고 지방판매를 전담케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서울영업소에
있는 테크니컬센터. 테크니컬센터에서는 연간 1백여명의 수강생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두달동안 무료로 동양방전에서 생산하는 각기종의
기계를 교육시킨다. 그리고 이들제품판매와 함께 테크니컬센터수료자들의
취직을 알선해 준다. 자사제품을 훤히 알고 있는 이들 수료생들 덕택에
AS걱정은 따로없다. 기계도 팔고 AS부담도 줄인다. 일석이조다.
동양방전이 순탄하게만 성장 해온 것은 아니다. 이사장은 이 대목에서
일본을 안떠올릴수 없다고 한다. 기술은 일본쪽에 몰려있어 일본을
뚫어야만 했다.
그는 자동차부품용 머시닝센터를 개발하고 싶었다. 이때가 87년이다.
관련잡지에서 일본브라더사기술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으로
날아갔다. 브라더사의 말단 담당자가 약속도 안하고 찾아왔느냐고
문전박대를 하려했다. 예의가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래서 이사장은 "난
세일즈맨이다. 오지말라고 했어도 왔을 것"이라며 외국손님에게 이럴수
있느냐고 거꾸로 예의론을 들고 나왔다. 훔치러온 것이 아니고 단지
보러왔다고도 졸랐다.
기술후진국 기업체의 사장으로 서럽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결국 브라더사와 기술제휴계약을 체결했다.
이사장은 일본에 자사제품을 수출하고 싶어한다. 일본진출은 곧 세계시장
진출의 서막이 될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동양방전은 지난 5월 러시아공화국에 CNC방전가공기와 CNC와이어커터를
각각 1대씩 수출했다. 처녀수출이다.
이사장은 이를 계기로 세계시장진출의 고삐를 늦추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남궁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