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홍영후(1898 1941)라면 잘 모를 것이다. 그러나 홍난파하면
우리가곡"봉선화"와 함께 얼른 그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난파는 아호이다.
"울밑에선 봉선화야/네모양이 처량하다/길고 긴날 여름철에/아름답게
꽃필적에."
그가 펴낸 단편집 "처녀혼"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의 멜로디를
실었는데,김형준이라는 친구가 가사를 붙은것이 바로 "봉선화"였다.
"고향의 봄"은 오늘에도 나북의 벽을 넘어 널리 애창되고 있다. 노산이
지은 "성불사의 밤"과 함께 온 겨레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아닌가.
중학생때 이미 독보법을 터득한 천재 음악인.그러나 그의 생애는 결코
순탄한게 아니었다. 일본 우에노(상야)음악학교에 다닐때 3.1운동이
일어나서 귀국,그이듬해 "봉선화"를 발표하자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다.
36년엔 흥사단 단가를 지었다는 죄명으로 도산 안창호선생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꽃다운 44세때 유명을
달리한것도 그 후유증 때문이었다.

큰 인물은 바람도 많이 탄다. 그래서 때로 평가가 엇갈린다. 춘원이
그랬듯이 난파의 후기인생도 친일과 변절로 얼룩졌다.

비록 강요된 것이었을망정 그건 치욕일수 밖에 없었다. 40년 여름
매일신보에 쓴 "지군사변과 음악"이라는 산문은 "성전 3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로 시작된다. 성전은 물론 일본이 일으킨 제2차대전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그가 "8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자 민음협등에선 반론을 펴고
나섰다. 민족의 슬픔과 한을 "봉선화"를 부르며 삭였던 홍난파 팬들에겐
"공군가""희망의 아침""장성의 파수"등 친일가요의 작곡가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다. 참으로 옥에 티가 아닐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이 "봉선화"의 작곡가인 그를
그리워하는건 워낙 이 노래가 온겨레의 심금을 울린 때문이었을까.
서양음악으로 치자면 그는 바흐와 같은 존재.오는 30일이면 타계한지
51주기가 된다.

모처럼 그를 위해 푸짐한 행사계획이 마련된 모양이다. 앞뒤로
골칫거리들이 많은 현실이지만,8월을 홍난파와 함께 지내는것도 의의가
있을성 싶다.

여름도 한복판,물밑에선 봉선화대신 칸나가 고개를 쳐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