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의 "삼국유사"가 없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민족적 자아발견의
역사체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등 정치적 흥망과 변천을 편년식으로
기술한 한국 최고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 이외에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부여 가락 후백제 발해까지도 포괄 서술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특히 고조선과 발해가 한국사의 체계안에서 다루어진 것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그 공적은 우뚝하다.

민족의 사상사 내지는 정신사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단일민족으로서의
건국이념을 밝혀주는 단군신화가 없었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등 삼국의
건국신화에 바탕을 둔 분립이 정당화되어 왔을 가능성은 크다. 그러한
일연의 새로운 역사체계가 "민족통일"의지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아니라 "삼국유사"에는 정치를 중심으로한 그때까지의 역사서술형식을
벗어나 신화 신앙 전설 설화 민속 사회 미설 시가등 한국고대사회의 정신적
유산을 총집대성해 놓은 것 또한 찬연한 족적이 아닐수 없다.

한마디로 "삼국유사"는 고대한국인의 얼과 삶,멋과 애환의 참모습이
알알이 살아 숨쉬는 보고다.

일연이 민족사관적 견지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한데에는 원의 침략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그 밑바탕에 깔고 있었다. 고려조가 원에 굴복하여
자주성을 잃은 가운데 청장년기를 보낸 그로서는 일제기의 단재 신채호처럼
민족 정체성의 회복을 역사의 복원에서 찾았던 것 같다.

문화부는 일연이 1206년(고려희종2년)7월12일 지금의 경북경산에서 태어난
달을 맞아 그를 "7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기리고
재조명하는 갖가지 행사를 갖게된다.

일연은 그의 자,본명은 김견명,시호는 보각. 선비집안에서 자란 그는
14세에 불교에 입문하여 22세에 승과에 수석으로 합격한뒤 수도에
정진하던중 원의 침략을 받게되자 민족자존에의 의식이 싹튼다.

대사 선사 대선사의 승계가 주어진다. "삼국유사"5권을 비롯 100여권의
방대한 저서를 남긴다.

"일연의 달"이 한낱 구호에 그치지 않고 통일에의 의지를 가다듬는 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