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해군 장교 출신 귀화 미국인 증언 ***
태평양전쟁 당시 미해군 정보장교로 참전,오키나와포로수용소에
수용돼있는 조선인 종군위안부들을 심문했던 장본인이 16일 당시 자신이
목격했던 위안부들의 참상을 증언하고 나섰다.
*** 일패전 직전 오키나와 포로수용소에 30여명 ***
현재 서울에서 쌍용증권고문으로 근무하고 있는 민병갈씨
(70.미국명 칼 페리스 밀러)는 이날 1945년 6월 당시 오키나와
기노자(의야좌)인근 포로수용소에 30여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조선인군인,군속등과 함께 수용돼있었으며 이들 모두를
심문,위안부로 끌려온 경위,생활,위안소운영실태등을 조사해 미군사령
부에 보고했다고 밝혔다.
민씨는 위안부들은 처음에는 일본군과 같은 포로취급을 받다가 이들이
강요나 모집에 의해 끌려왔다는 특수한 처지가 인정돼 별도의 캠프에
수용됐으며 이들은 출입이 통제된 캠프에서 주로 세탁등의 잡일을 하며
지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조사당시 위안부들은 대체로 건강하고 비교적 교육정도가
높아 보였으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위안부가 되고 말았다고
밝힌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민씨는 여자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 가량이었으며 이들은
"일본군인들을 상대할때는 대개 한 사람당 30분씩 시간이 주어졌고
장교에게는 사병보다 비싸게 받았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미군정 근무로 인연을 맺은 후 줄곧 한국에 살면서 귀화한 그는
"위안부들에 대한 심문보고서는 1사람당 1장씩 작성돼 상부에
보내졌다"면서 "미국 국방부 자료실 등에 확인해보면 당시 보고서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평양전쟁중 최대의 격전이 벌어져 일본측 희생자만 20여만명에
달했던 오키나와에는 본섬 뿐만 아니라 게라마(경양간)열도,도카시키등
주변 섬 곳곳에 위안소가 설치돼 상당수의 위안부들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5년 6월 함락된 오키나와의 포로수용소에 조선인 위안부들이
수용돼있었다는 사실은 최근 수용자명부가 발견되고 당시 ''오키나와
본토에서 40명,주변섬에서 1백10명의 조선인 위안부들이 포로로 잡혀
귀환을 위해 대기중이다''는 내용의 오키나와 주둔 미해군정당국보고서가
미국 후버연구소에서 발견되면서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 있다.
이와함께 44년 버마(현 미얀마)전선에 투입됐던 조선인위안부 20여명을
상대로 미군심리전팀이 동원경위,생활실태등을 심문,조사했던 보고서가
미국립문서국에서 발견됐으나 당시 위안부들을 직접 면담조사한
미군관계자가 나타나 증언하기는 민씨가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