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 창립 30주년 최대경제단체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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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경제인연합회가 16일로 창립 30주년을 맞는다.
지난 61년 경제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13명의 경제인이 모여 발기한
전경련은 그동안 한국경제성장의 모습만큼이나 큰 변모를 겪으면서
4백61개기업과 단체를 회원으로 거느리는 경제단체로 성장했다. 오늘날
전경련이 거느리고 있는 기업군은 모두 4천개를 넘으며 연간 매출액은
1백50조원에 달해 회원수에서는 다른 경제단체에 뒤지지만 규모와
영향력면에서는 사실상 국내 최대의 경제단체로 꼽힌다.
창립과 함께 시멘트, 제철, 비료, 전기, 정유, 인견사, 화학, PVC,
섬유, 자동차 등 10개 분야의 "기간산업 건설계획안"을 내놓는 등
경제전반에 걸친 정책제안과 건의를 해온 전경련은 울산공업단지,
수출산업공단, 수출자유지역설치 등을 제안, 정부와 공동으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끝에 공단을 조성, 산업입지를 확보하는 등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전경련은 또 최초의 민간개발 금
융기관인 한국개발금융(현 장기신용은행)을 유엔산하 국제금융공사(IFC)와
공동으로 설립하고 신기술 개발과 중소기업형 모험산업 창업을 지원하는
한국기술개발(주) 및 한국창업투자(주)를 잇달아 설립, 민간주도경제
정착에도 앞장서 왔다.
전경련의 외형이 이처럼 성장하고 업계의 의견을 대변, 정책에
반영시키는 등 규모에 맞춰 영향력도 커지자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경련 회장의 영향력도 "재계총리"로 불릴 만큼 막강해졌다.
창립이래 30년 동안 전경련은 20대 회장을 맞아들였으나 한 사람이
여러차례 회장직을 연임하기도 해 실제로는 이병철, 이정림, 김용완,
홍재선, 정주영, 구자경, 유창순씨 등 7명이 이자리를 맡아왔다.
초대회장을 맡았던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은 이 자리를
1년밖에 맡지 않았지만 그룹일을 제외하고는 생전에 가졌던 유일한
대외직이었다. 이회장은 재임중 당시 기업차원에서는 전무했던 조사부를
전경련에 설치하고 사무국 직원의 공채 제도를 도입해 회장이 바뀌더라도
전문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등 초창기 전경련의 내부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이회장에 이어 2.3대 회장을 지낸 개성시내 상점 점원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인 이정림회장(90년 작고)은 재임기간중 소외돼 있던 비회원들이
별도의 단체설립 움직임을 보여 재계가 양분될 위기를 맞았을 때 특유의
포용력으로 이들 소외그룹을 회원으로 끌어들여 전경련의 위상을 높였다.
4.5대와 9-12대 등 6대에 걸쳐 10년간 재임, 역대 회장중 최장수
기록을 남긴 김용완회장은 궂은 일을 꺼려 회장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던
시절에 회원들이 형식적인 투표방식까지 동원해 억지로 앉히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최장수 재임기록을 남긴 경우. 김회장은 자신의 의견을
내기보다 여론을 모아 합의를 끌어내는 스타일로 재계와 정부의 중개자
역할을 해냈다.
6-8대 회장을 지낸 홍재선씨(80년 작고)는 금융계 출신의 비오너
회장으로 실물 경제와 금융부문을 접목시키는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3-17대에 걸쳐 5대를 역임한 정주영회장은 "독주가
지나쳤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 전경련의 자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대 회장을 지낸 구자경회장은 재계 원로들의 강권에 못이겨 회장직을
맡았지만 그룹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전경련에 할애할 만큼 열성을
보였으며 국무총리를 역임한 유창순 현 회장(19-20대)은 국민경제이익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재계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혀 일부
재계인사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창립 30주년을 맞은 전경련의 공과는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경제발전의 일선에서 성장의 주역을 맡아온 공은 마땅히 평가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고도화로, 노동의 비교우위에서
기술자본의 비교우위로 바뀐 현재의 상황에서 고용과 이윤창출이라는
기업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면서 환경과 근로자 복지증진 등 그동안 성장의
그늘에 가려 소홀해 왔던 문제들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의 조화를 이루어 나가느냐에 따라 창립 30주년을 맞은 "장년
전경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
지난 61년 경제재건을 기치로 내걸고 13명의 경제인이 모여 발기한
전경련은 그동안 한국경제성장의 모습만큼이나 큰 변모를 겪으면서
4백61개기업과 단체를 회원으로 거느리는 경제단체로 성장했다. 오늘날
전경련이 거느리고 있는 기업군은 모두 4천개를 넘으며 연간 매출액은
1백50조원에 달해 회원수에서는 다른 경제단체에 뒤지지만 규모와
영향력면에서는 사실상 국내 최대의 경제단체로 꼽힌다.
창립과 함께 시멘트, 제철, 비료, 전기, 정유, 인견사, 화학, PVC,
섬유, 자동차 등 10개 분야의 "기간산업 건설계획안"을 내놓는 등
경제전반에 걸친 정책제안과 건의를 해온 전경련은 울산공업단지,
수출산업공단, 수출자유지역설치 등을 제안, 정부와 공동으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 끝에 공단을 조성, 산업입지를 확보하는 등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왔다. 전경련은 또 최초의 민간개발 금
융기관인 한국개발금융(현 장기신용은행)을 유엔산하 국제금융공사(IFC)와
공동으로 설립하고 신기술 개발과 중소기업형 모험산업 창업을 지원하는
한국기술개발(주) 및 한국창업투자(주)를 잇달아 설립, 민간주도경제
정착에도 앞장서 왔다.
전경련의 외형이 이처럼 성장하고 업계의 의견을 대변, 정책에
반영시키는 등 규모에 맞춰 영향력도 커지자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전경련 회장의 영향력도 "재계총리"로 불릴 만큼 막강해졌다.
창립이래 30년 동안 전경련은 20대 회장을 맞아들였으나 한 사람이
여러차례 회장직을 연임하기도 해 실제로는 이병철, 이정림, 김용완,
홍재선, 정주영, 구자경, 유창순씨 등 7명이 이자리를 맡아왔다.
초대회장을 맡았던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회장은 이 자리를
1년밖에 맡지 않았지만 그룹일을 제외하고는 생전에 가졌던 유일한
대외직이었다. 이회장은 재임중 당시 기업차원에서는 전무했던 조사부를
전경련에 설치하고 사무국 직원의 공채 제도를 도입해 회장이 바뀌더라도
전문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등 초창기 전경련의 내부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이회장에 이어 2.3대 회장을 지낸 개성시내 상점 점원출신의 입지전적
인물인 이정림회장(90년 작고)은 재임기간중 소외돼 있던 비회원들이
별도의 단체설립 움직임을 보여 재계가 양분될 위기를 맞았을 때 특유의
포용력으로 이들 소외그룹을 회원으로 끌어들여 전경련의 위상을 높였다.
4.5대와 9-12대 등 6대에 걸쳐 10년간 재임, 역대 회장중 최장수
기록을 남긴 김용완회장은 궂은 일을 꺼려 회장을 맡으려는 사람이 없던
시절에 회원들이 형식적인 투표방식까지 동원해 억지로 앉히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최장수 재임기록을 남긴 경우. 김회장은 자신의 의견을
내기보다 여론을 모아 합의를 끌어내는 스타일로 재계와 정부의 중개자
역할을 해냈다.
6-8대 회장을 지낸 홍재선씨(80년 작고)는 금융계 출신의 비오너
회장으로 실물 경제와 금융부문을 접목시키는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3-17대에 걸쳐 5대를 역임한 정주영회장은 "독주가
지나쳤다"는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 전경련의 자율성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대 회장을 지낸 구자경회장은 재계 원로들의 강권에 못이겨 회장직을
맡았지만 그룹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전경련에 할애할 만큼 열성을
보였으며 국무총리를 역임한 유창순 현 회장(19-20대)은 국민경제이익에
부합되지 않을 때는 재계이익을 포기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혀 일부
재계인사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창립 30주년을 맞은 전경련의 공과는 보는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경제발전의 일선에서 성장의 주역을 맡아온 공은 마땅히 평가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경제가 양적 성장에서 질적 고도화로, 노동의 비교우위에서
기술자본의 비교우위로 바뀐 현재의 상황에서 고용과 이윤창출이라는
기업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면서 환경과 근로자 복지증진 등 그동안 성장의
그늘에 가려 소홀해 왔던 문제들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의 조화를 이루어 나가느냐에 따라 창립 30주년을 맞은 "장년
전경련"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다.